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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산주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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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공산주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이란 책 첫머리에 공산주의를 유령(귀신)에 비유한 말은 자신들의 정체를 스스로 자인한 것인데
  성경에 보면 공산당은 붉은 용(마귀 사단)의 감화를 받아 출현한 짐승의 사상일 뿐입니다.(계13장)
  1917년 공산혁명(계8:7 ~) 이후에 1억이 넘는 수 많은 고귀한 생명을 공산주의라는 미명아래 처참하게 살해하였습니다.
  공산당은 무신론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공상적 사회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 그리고 1848년 마르크스,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등으로부터, 1917년을 기점으로 러시아의 피흘린 투쟁 혁명의 불길을 통하여 일어난 소련 공산당은 지구상의 1/3을 공산화하여(계8:7~) 자본주의와 두 놋산처럼(슥6) 대결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종교, 경제, 정치등 각 분야에서 궤휼정책인 평화 협상으로(사33:7-9) 세계가 사상적으로 사망인 청황색말이요(계6:7-8)
  미혹의 쑥물을 먹고(계8:11) 기독교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공산당은 변증법적 유물사관의 확고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원시공산사회, 고대노예사회, 중세봉건사회, 근대자본주의사회에서 과학발전으로 황금만능의 빈부격차를 없이하고 다같이 잘사는 지상낙원 건설을 위하여 폭력 투쟁 혁명으로 계급사회와 가진 자를 멸절시켜 버리고 계급 없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사회를 거쳐 이상적인 공산사회로 변화 발전한다는 것이 공산주의의 역사 철학입니다.
  공산세력이 약해졌다고 공산주의의 실험은 끝났다고 하는 분들이여! 하나님을 부정하고 기독교를 말살하려는 그들의 무신론사상이 변했겠습니까?
  경제난으로 어려워진 공산당의 전진을 위한 후퇴요, 종교를 역이용하여 박멸하기 위한 궤휼적인(사24:16~) 바벨론의 협상정책(사39:1-7)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이 세상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수 많은 성도를 죽이고 교회를 파괴한 하나님의 대적입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그리스도 대신에 개인 우상을, 교회 대신에 당 조직을, 사랑 대신에 계급투쟁 또는 혁명을, 성서대신에 공산당선언을, 천년왕국 대신에 변증법적 유물사관을 대체시켜놓은 것이다." - 데이빗 벤슨 -

 "성서의 표절당한이념 이것이 공산주의다" - 아놀드 토인비 -


※. 공산주의의 잔학상
 
 1). 베트남.  캄보디아 공산화의 교훈
 2). 북괴의 6.25남침과 각종 도발사건
 
   ① 북괴의 6.25남침
   ② 청와대 기습사건
   ③ 울진 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④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⑤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파사건
   ⑥ KAL기 폭파사건
   ⑦ 소떼 방북과 동해안 잠수함 침투
   ⑧ 7.4공동성명과 북한의 남침땅굴
 

  1. 베트남.  캄보디아 공산화의 교훈  <옮긴글>
 
   1917-70여 년간 공산주의의라는 미명아래 1억 5천만명이 학살(10분에44명) 되었다.
  베트남식으로 통일이 된다면 제일 먼저 한총련 좌익계열의 학생들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 범민련 등 좌익계열의 인물들이 살육을 당할 것이다. 베트남의 '재교육캠프'에서 가장 먼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남쪽베트남의 좌익세력들이었다.
  
  북한 정권 초기에 과거 남한에서 로동당활동을 했던 '남로당'인물들은 거의 다 숙청당했다. 한총련이나 범민련 남측인사들은 어쨌든 남한에서 '대학물'을 먹은 '브루조아지그룹빠'에 속하기 때문에 '너무 똑똑해서 말이 많으므로' 통일공산국가를 세우고 이끌어가는데 골치아픈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처단대상 제 1호에 속할 것이다.
 
  통일베트남에서는 '재교육 캠프'에서 대학교를 나온 사람들과 불교도및 종교인들 약 2000만명을 살육했다.
지금 베트남이 경제적으로 개방 개혁 정책을 쓰고 있지만 그것은 재교육 캠프에서 희생된 2천만명의 살육의 피 위에 세워진 것이다.

  크메르의 폴 포트는 대학교육을 받은 지성인과 종교인등 약300만명을 살육했다.
캄보디아 인구 8백만이 3백70만으로 줄었다. 약 4백 30만이 학살, 또는 아사했다.
  심지어 일자무식의 인민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죽임을 당한 경우도 있었고 국제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스포츠맨 2천명이 살해되기도 했다.
  
  "폴 포트의 측근엔 북괴의 김일성이 파견한 정치공작대가 있었고 폴 포트의 만행은 주로 김일성의 수법을 본 딴 것이었소 폴 포트와 더불어 김일성도 규탄되어야 할 것이요." - 프랑스 언론인 르크레 -
 

   2. 북괴의 6.25남침과 각종 도발 사건
 
  북한에 있어서 공산주의는 대뜸 범죄로서 시작했다. 물론 소련이 장본인이고 김일성은 그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북한의 공산괴뢰정권이 범죄로 시작되고 범죄로서 일관되었다는 사실만은 명심해야 한다.
 
 

① 북괴의 6.25남침 
 
  북한의 김일성은 1949년 6월 미국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데 이어 한국과 대만을 극동방어선(일명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시키자 한국을 공산화하기 위해 소련 스탈린의 승인을 받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38선 전역에 걸쳐 기습남침을 감행하였다.

  유엔은 즉시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북한의 공격을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원상복구'를 요구하였으나 북한이 불응하자 미·영·호주 등 21개국(의료 지원국 5개국 포함)이 UN군을 창립, 한국을 지원하였다. 전쟁초기 한국군보다 월등한 화력과 병력(한국군의 약 4배)을 보유한 북한군은 한달여만에 한국의 4분의3을 점령하였으나 9월15일 한국군과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패주를 거듭하여 압록강까지 후퇴하였다.

  그러나 10월16일 중국이 갑자기 10만여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북한군을 지원하자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38도선 상에서 대치상태를 보이다가 1953.7.27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정전되었다.

  북한 독재자 김일성은 무모한 남침전쟁 도발을 자행하여 660만여명의 사상자(군인 230만,민간인 430만여명)를 발생시키고 공장(900여개)·주택(60만여동)·산업시설과 전국토의 4분의 3을 초토화 시키는 용서받지 못할 반민족적 죄악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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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청와대 기습사건

  1968년 1월 21일밤 10시경 북한군 제 124군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침투하여 대통령관저인 청와대를 습격하려다가 비상근무중이던 경찰 검문에 걸리자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4대의 시내 버스에 수류탄을 던져 승객들을 살상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날밤 대간첩작전을 지휘하던 서울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을 비롯하여 7명의 군경과 민간인이 북한 무장공비들에의해 살해 되었다.

  군·경 수색대는 2월 3일까지 31명의 공비중 1명을 생포하였고 도주한 2명을 제외한 28명을 사살하였다. 생포된 공비 김신조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이들의 목적은
  1)대통령관저 폭파와 요인 암살. 2)주한 미대사관 폭파와 대사관원살해. 3)육군본부 폭파와 고급지휘관 살해. 4)서울교도소 폭파. 5)서빙고 간첩수용소 폭파후 북한간첩 대동 월북 등이었다.



③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

  북한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 120명을 15명씩 조를 편성, 침투시켜 군복· 신사복· 등산복 등으로 위장하여 게릴라전을 펴게 하였다.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11월3일 새벽 주민들을 모아놓고 남자는 남로당, 여자는 여성동맹에 가입하라고 총검으로 위협하였다.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머뭇거리자 대검으로 찌르는등 만행을 자행하고 뒤늦게 도착한 주민은 돌로 머리를 쳐서 죽이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소사 초등학교 계방분교 2학년에 재학중이던 이승복 (당시 10세) 어린이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주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릴레이식으로 신고하여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군경의 출동을 가능케하였다. 군경과 예비군은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착수, 12월 28일까지 약 2개월간 계속된 작전에서 공비 11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여 침투한 120명을 모두 소탕하였다.
  이 작전에서 우리측도 군인·경찰과 일반인 등 20여명이 사망하는 많은 희생을 치렀으나 북한이 아무리 잔악한 공비를 침투시켜도 이를 격멸할 수 있다는 튼튼한 안보태세를 실증으로 보여주었다.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은 북한이 우리나라의 산악지대와 농촌에서의 게릴라활동 가능성을 탐색해 본 것이며, 한국에서 월남과 같은 전쟁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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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6년8월18일 북한은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에서 나무가지치기 작업을하던 UN군 소속 미군 장교 2명을 도끼로 살해하는 국제적 만행을 자행하였다. 8월 18일 상오 10시 45분경 UN군 11명 (한국군 5명,미군 6명)이 한국노무자 5명과 함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남쪽 UN군측 제 3초소 근처에 있는 미류나무 가지를 치고 있을 때 북한군 30여명이 접근하여 가지를 치지 말라며 시비를 걸었고, 합법적인 절차를 따른 것임을 설명하던 미군장교의 뺨을 때리면서 더 이상 자르면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미군장교가 항의하자 북한군은 초소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30여명의 증원부대와 함께 폭력을 행사, 도끼로 미군 보니파스 대위와 발레트 중위를 내리쳐서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고 9명의 한·미군 장병에게 중경상을 입히는 한편, UN군 트럭 3대와 초소를 모두 파괴하였다.

  한·미양국의 강경한 태세에 김일성은 인민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21일 하오 스틸웰 UN군 사령관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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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미얀마 아웅산묘소 폭파사건

  북한은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를 친선방문중이던 한국 전두환대통령 및 수행원들의 아웅산 국립묘소 참배를 이용, 암살하기 위해 사전에 이 묘소건물 천정에 설치한 원격조종폭탄을 폭발시켜 한국의 부총리·장관등 수행원 17명을 순국케하고 14명을 부상시키는 천인공노할 테러를 감행했다. 

  미얀마 당국의 수사결과 이 사건은 북한 독재자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모(某) 소좌, 강민철대좌, 신기철대좌 등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밝혀졌다.

  미얀마 정부는 이 사건의 수사를 매듭지으면서 11월4일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양곤에 있는 북한대사관 직원들의 국외추방을 단행했다. 그뒤 12월 9일 양곤지구 인민법원 제 8특별 재판부에서는 테러범에 대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이 사건으로 코스타리카·코모로·서사모아 등 3개국이 북한과의 외교를 단절하였으며, 미국·일본 등 세계 69개국이 대북한 규탄성명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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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KAL기 폭파사건

  1987년 11월 28일 밤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출발한 대한항공 858기가 아랍 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 기착한 뒤 방콕으로 향발했다.

  이 여객기는 11월 29일 14시 1분 미얀마의 벵골만 상공에서 방콕공항에 "45분 후 방콕에 도착하겠다.비행중 이상 없다"는 보고를 무선으로 보낸 것을 끝으로 소식이 끊어졌다. 이 여객기에는 중동에서 귀국하던 한국인 근로자 등 승객 93명과 외국인 2명,승무원 20명 등 모두 115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여객기 잔해가 태국 해안에서 발견되었다고 태국 내무부가 발표하였고,30일 오후 858기의 추락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12월 1일 사고 비행기에 한국입국이 금지된 "요주의 인물"인 일본인 2명이 탑승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급진전되었다. 문제의 두 일본인은 '하치야 신이치'·'하치야 마유미'라는 여권을 가진 남녀로 바그다드에서 탑승한뒤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으며,이중 마유미의 여권은 위조여권임이 바레인(탈출로 중간기착지)공항에서 밝혀졌다.
  이들은 바레인에서 요르단으로 탈출하려다 위조여권 적발로 체포되자 담배 속에 숨겨둔 독극물을 삼켜 자살을 시도하여 남자는 숨지고 여자는 중태에 빠졌다.

  한국으로 신병이 넘겨진 '마유미'여인은 중국어와 일본어를 사용하며 중국인행세를 해오다가 12월23일 범행을 자백했는데 본명이 김현희(당시 26세)이며 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으로서 음독자살한 김승일(당시 70세)과 함께 "88 서울올림픽 개최방해를 위해 KAL기를 폭파하라"는 북한 김정일의 친필 공작명령을 받고 기내 좌석선반에 라디오와 술병으로 위장한 폭발물을 놓고 내려 공중에서 폭발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후 김현희는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1990.3.27)되었으나 전향의사 표명과 김정일의 도구로써 이용된 점이 정상참작되어 대통령 특별사면(1990.4.12)으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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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소 떼 방북과 동해안 잠수함 침투
  1996.9.18 00:55경 강릉시 강동면 동해고속도로 상에서 택시기사가 거동수상자 2명과 해안가에 좌초된 선박 1척을 경찰에 신고하였다.

  좌초된 선박이 북한의 소형 잠수함으로 확인됨에 따라 군인·경찰· 예비군은 합동으로 무장공비에 대한 소탕작전에 돌입하였다. 이 수색·소탕 작전중 잠수함과 도주로 주변에서 중화기인 대전차 로켓을 비롯하여 M-16·AK소총·정찰용지도 등 유류품367종 4,380점을 노획하고 조타수 이광수(31세, 상위)를 생포하였으며, 동승했던 정찰조원들이 북한의 지령에 따라 잠수함 좌초책임을 물어 사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승조원 11명의 사체를 발견하였다. 도주한 잔당을 추적한 끝에 정찰조장·잠수함장 등 13명을 발견하여 교전끝에 사살하였으나 아군 11명,경찰·예비군 2명, 민간인 4명이 피살되는 인명희생을 당했다.

  생포된 이광수에 의하면, 이들은 북한의 대남공작기구중 하나인 인민 무력부 정찰국 해상처 22전대 소속으로 94년 12월 함남 신포에서 건조된 300톤급 잠수함을 타고 총 26명이 침투하여 강릉비행장· 영동발전소등을 정밀 촬영하였는데, 침투 임무는 전쟁에 대비하여 한국의 군사시설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는 한편, 강원도에서 열리는 전국체전에 참석하는 주요 인사들을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결국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은 북한 김정일의 직접적인 지령에 따라 남침계획을 구체화시켜 나가기 위해 사전정찰 및 한국 내정교란을 목적으로 자행한 명백한 군사침략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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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98년 6월22일 오후 4시 33분쯤 강원도 속초시 동쪽 11.5마일(18Km)지점 우리 영해에서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 1척이 어선이 뿌려놓은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표류하다 해군 함정에 의해 6월23일 새벽 동해안으로 예인됐다.
(1차 소떼 방북 98년 6월16일 500마리)

  이 잠수정에서는 승조원과 공작원 등으로 추정되는 9구의 시신이 자폭한 채 발견됐다.
중앙합동신문조의 수사결과 사망자 가운데 4명은 머리에 총상을 입은 상태였으며 나머지는 난사 당한 흔적이 발견돼 공작조가 승조원들을 죽이고 권총 자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발견된 잠수정은 레이더 탐지가 어렵고 잠수 및 발진속도가 빨라 북한이 정찰 및 침투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70톤 규모로 길이 20m , 폭 3.1m인 유고급 잠수정이다.
  북한의 잠수정이 침투한 것은 96년9월 18일 강릉 무장간첩 침투사건 이후 처음이다.

  결국 북한의 잠수정 발견은 북한이 대외적으로는 대화 제스처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전쟁준비에 몰두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도 대북 경수로건설사업 등 남북간의 경제협력은 계속되던 상황이었다.
 
  북한은 53년 이후 휴전선에서의 도발, 무장공비 침투 등을 통해 남한을 교란시켰고, 70년 이후에만도 309차례, 90년 이후에만도 15차례나 해상과 육상을 통해 무장간첩을 침투시켰다.

  이로써 또다시 '대화' 뒤의 '도발'이라는 북한의 두 얼굴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⑧ 7.4공동성명과 북한의 남침땅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땅밑으로는 땅굴을 파고 위로는 평화의 제스처로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971년 9월25일 김일성은 당 대남공작총책 김중린과 인민군 총참모장 오진우에게 "남조선을 조속히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속전속결 전법을 도입, 기습남침을 감행할 수 있어야 하며 특수공사를 해서라도 남침땅굴의 굴착작업을 완료하라"고 지시하면서 "하나의 갱도는 10개의 핵폭탄보다 효과적이다"고 강조하였다.
 
  북한은 이 지시에 따라 최신형 굴착기를 스웨덴 등지에서 비밀리에 도입,「특수공사」로 위장하면서 1972년 5월부터 남침용 땅굴작업을 시작하였고 1974년 2월초에는 오진우·유장식 등 군·당 고위층들이 독려차 현장을 방문하는등 공사 조기완료를 위해 온힘을 쏟아 부었다.
 
  북한이 전선전역에 걸쳐 이처럼 많은 땅굴을 파놓은 것은 유사시 경보병 및 특수부대를 대규모로 침투시켜 대한민국의 주력부대를 무력화시키고 전쟁을 단기에 끝내겠다는 목적 뿐 아니라 우리사회가 혼란해질 때 무장게릴라들을 남파시키는 침투로로 활용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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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굴 역사는 북한이 1971년 남조선 인민 해방이라는 이유로 착수하여
제1 땅굴이 1974.11.15에 길이 3.5km 규모가 고량포에서 발견
제2 땅굴이 1975.3.19에 길이 3.5km 규모가 철원에서 발견
제3 땅굴이 1978.10.17에 길이 1.6km 규모가 판문점에서 발견
제4 땅굴이 1990.3.3에 길이 2km 규모가 양구에서 12년만에 발견 되었다. 
이후 1996년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에서 땅굴징후 발견되어 1999년 3월에 시추가 개시되고, 2000년 1월에 시추공을 통해 내시경으로 동굴내부 촬영과 청음기에 의한 기계소음과 전기 유도음까지 청취 확인함으로써 SBS가 3월에 공식보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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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청수복 2023.01.06 05:53
    멸공진리로 승리하여야 완전 승리이다. 주여 변화성도들을 어서 세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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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언, 2. 멸공진리 운동에 대한 의의 1
3. 공산주의란? 1 file
4. 성경적인 멸공 1 file
5. W.C.C. 통한 공산주의의 세계교회 침투 2
6. 인간의 종말과 우리의 사명 1
7. 맺는 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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