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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개인전도로 가르친 말씀
 
  총 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전도하실 때에 대중을 상대하여 가르치는 것보다도 한 사람을 앞에 놓고 가르친 시간을 더 중요시하고 겸손하고 사랑스러운 태도로 교훈하신 말씀을 이 달에 공부하기로 한다.
 







제1과  나다나엘에게 가르친 말씀
- 요1:47~51,  요절:47 -
 
 서 론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향하여 가르친 말씀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 말씀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배울 수가 있다.
 
  1대지 :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심 (47)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에 이스라엘 사람 중 유대인으로 세상에 탄생하시어 그 사람들의 마음을 볼 때 너무나 간사하고 전부 거짓이 많은 종교인으로 하나도 쓸 사람이 없어서 이방 갈릴리 벳세다 동네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간사한 것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므로 그들을 참 이스라엘로 인정하시고 사도로 택했던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거룩한 옷을 입고 거룩한 성경을 옷단에 기록하고 거룩한 모습을 가지고 예루살렘 거리에 왕래하는 대제사장들과 제사장 무리와 교법사, 유사, 장로들을 볼 때에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씀을 하게 되었고 세례요한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책망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차라리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면 병을 고쳐 주고 눈물겨운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셨지만 이러한 사람들이 간사스럽게 일을 하고 행동을 하고 모양을 내고 다닐 적에 너의 아비는 마귀라고 말씀했던 것이다(요8:44). 왜냐하면 간사하기 때문이다. 진실하신 예수님께서 간사한 사람을 볼 때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책망을 하시며 외식하는 자들은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참 이스라엘이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간사함이 없는 사람을 찾아서 죄를 사해주시며 지혜를 주시고 지식을 주시고 능력을 주어서 역사하는 것을 복음적인 역사라는 것이다.
 
  2대지 : 은밀한 일을 기억하심 (48)
  나다나엘은 자기네 집 앞에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날마다 묵상을 하며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신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은 은밀한 가운데 중심을 바쳐 묵상하는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리새교인들은 회당과 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하고 언제나 대중을 가르친다는 선생으로서 전부 명예, 교권, 야욕에 끌려 삯꾼의 생활을 하고 있는 부패한 교계를 떠나 한적한 갈릴리 어촌 조용한 곳에 무화과나무를 의지하고 날마다 마음을 바쳐 기도하는 나다나엘은 사도가 될 자격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교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대적이 되어 예수님을 마귀라고 판단을 내리고 정죄를 했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조금이라도 외식하는 자가 된다면 얼마나 영계가 어두워진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간사함이 없이 은밀하게 보시는 주님 중심에서 기도하는 자는 영계가 밝아서 나사렛 예수를 만날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숨은 기도를 인정한다는 뜻으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했던 것이다.
 
  3대지 : 큰 증거가 나타날 것을 말씀하심 (49~51)
  나다나엘은 자기의 비밀을 안다는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인 줄 알고 말했던 것이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이것은 나다나엘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 승천하는 일을 보고 증거하는 사명이 있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만일 하늘로부터 예수님을 증거하는 표적이 더 크게 나타난 일이 없고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는 것을 보았다는 정도만 가지고는 완전한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네가 나를 위하여 증인이 되려면 더 큰 증거를 보아야만 된다고 말씀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람을 들어 쓸 적에 막연하게 믿어라 전하라 하는 것이 아니고 증거할 만한 여러 가지 표적을 보여 주시고 이것을 증거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택한 사람을 들어 쓰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선지와 사도들은 성경을 그 당시에 기록하는 사명이 있으므로 직접으로 증거를 보여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가장 완전한 역사는 완전한 말씀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역사라고 본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처음에 따를 적에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고 따랐지만 그 믿음을 가지고 여러 가지 나타난 증거를 기록한 것이 그들이 쓴 신약 전서인 것이다.
 
 결 론
  하나님께서 나다나엘을 택하셨지만 친구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도록 소개했고 예수님을 만날 때에 예수님이 그 비밀을 말하므로 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게 되었고 다음에는 여러 가지 나타나는 증거를 친히 목도하고 완전한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아무리 택한 사람들이지만 처음에는 사람의 인도를 따르게 되고 다음에는 믿음이 생기게 되고 다음에는 큰 증거를 보고 크게 쓰여지는 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 역사는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되 순서 있게 깨닫도록 하시어 완전한 종이 되게 하는 것이다.
 




 
제2과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말씀
- 요3:1~21,  요절:5 -
 
 서 론
  주님께서는 대중을 상대하여 말씀할 때는 여러 가지 비유를 말씀했고 개인에 대하여 말씀할 때는 깊은 진리를 직접으로 말씀한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이 따라오는 심리를 볼 때 참 진리를 알아보려는 것보다도 구경거리로 또는 병이 낫고자 하는 마음으로 따라오는 것을 아는 주님은 진리를 말해주어도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또는 필요조차 없으므로 비유의 말씀을 들어서 간단히 말한 것 뿐이다. 그러나 진리를 탐구해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향해서는 다음과 같은 깊은 도리를 말씀한 것이다.
 

  1대지 : 중생의 도리 (1~13)
  주님께서 중생의 도리를 비로소 처음 입을 열 때에 한 사람을 앞에 놓고 말씀을 했다. 이것을 본다면 주님은 얼마나 겸손하시며 한 사람의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이 나타난다. 이제 중생의 도리에 있어서 순서 있게 말씀했다.

  첫째는 중생을 해야만 천국에 간다고 말씀했다.
  여기에 큰 진리가 있으니 중생의 역사는 그 영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역사라는 것을 뜻했다. 중생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승리로 이루어지는 열매이다.

  둘째는 물과 성신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 물에 잠겨서 올라오는 세례와 성신 세례를 받으므로써 완전한 천국의 시민권으로 인정받는 것을 뜻했다.
  성신 세례는 그 영을 완전히 하나님의 자녀로 권세를 얻게 하는 것이요, 물세례는 그 몸이 완전히 타락한 원죄에서 벗어나는 뜻이다. 그러므로 물과 성령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중생이라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인데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원죄로 타락한 몸은 물세례로 끝을 맺고 자범죄로 죽은 영혼은 성신 세례로써 완전한 종이 되게 하여 주님 대행자로 쓰는 것을 중생의 역사라는 것이다.
 

  2대지 : 영생의 도리를 말씀하심 (14~17)
  영생이라는 것은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다. 영생을 얻는데는 인간의 행위가 결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독생자의 의가 아니고는 감히 죽은 영이 살 수도 없고 또는 죽은 몸이 생명의 부활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었다는 것이 영생의 조건이요,
  둘째로는 죽기까지 순종했다는 것이 조건이 되는 동시에 믿었다는 것이 조건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독생자를 주었다는 것이요, 신자의 의는 의심 없이 믿었다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주는 이가 의를 행하므로 주게 되었고 받는 자도 그 의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영생이라는 것은 독생자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받는 것이요, 받은 자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은 영생을 받을 조건이 아니고 영생 받은 자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3대지 : 심판의 도리 (18~21)
  심판이라는 것은 율법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을 따라 행하는 것이니 독생자의 행하신 일을 믿지 않을 적에 이것은 벌써 정죄를 받는 일이 된다. 아무리 죄가 많아도 믿으면 사죄요, 믿지 않으면 정죄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부족을 깨닫고 십자가의 의를 믿을 적에 의를 행하신 예수님은 죄인을 대신하여 행하신 의이므로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이요, 독생자의 행하신 의를 믿지 않고 반대할 때에 아무리 도덕적으로 옳다 해도 영적으로 정죄를 받는 것이다.
  그 마음에 빛 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을 적에 벌써 흑암에 빠지게 되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보게 된다. 우리는 독생자의 의를 반대하고 믿지 않은 죄가 율법을 범한 죄보다도 더 큰 죄라고 본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행하라는 법이요,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신 법이니 이 법을 믿지 않는 사람은 율법보다도 율법을 초월한 예수님의 대적이 되므로 용서 없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결 론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중생의 도리와 영생의 도리와 심판의 도리를 말한 것은 너무나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중대한 진리를 한 사람을 앞에 놓고 가르친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을 온 천하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의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제3과  사마리아 여자에게 가르친 말씀
- 요4:10~26,  요절:24 -
 
 서 론
  하나님께서 지극히 작은 여자 하나를 얼마나 사랑한다는 것이 오늘 교훈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남자로서 진리를 탐구하려 찾아 온 사람이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께서 직접으로 찾아가서 그 여자에게 물을 구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훈을 하신 것이다.
 
  1대지 : 영생의 물을 말씀하심 (10~14)
  인간이 볼 때는 주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나 속화된 사람같이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해도 받지를 않고 무엇을 주어도 받지도 않는 것이 성별된 생활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친히 물을 요청하신 일이나 그 여자에게 무조건 영생의 물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너무나 그 시대 사람이 볼 때는 속화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 이러한 자에게 영생을 주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구하는 자에게 준다는 것이다. 아무리 죄가 많은 더러운 여자라도 구하면 주겠다는 것을 말씀했다.
 
  2대지 : 은밀한 죄를 말씀하심 (15~19)
  주님께서는 사람을 대할 때에 은밀한 죄가 무엇인 것을 먼저 아시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죄를 먼저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너 같은 사람이라도 나는 영생의 물을 줄려고 왔다고 먼저 말씀을 하시고 죄를 숨기려는 여자에게 네 죄가 이것이 아니냐고 말씀한 것은 그 여자를 무시하는 태도로 말씀한 것이 아니고 남편이 없다는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남편 다섯이 있지만 맨 먼저 만났던 남편이 네 남편이라고 말씀을 했다.
  주님은 언제나 그 생명을 불쌍히 보는 마음에서 영생을 받을 수 있는 택한 사람을 존경해서 죄를 알려주는 동시에 주님이 누구 신지를 깨닫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요, 죄를 지은 사람에게 소망을 말해 주고 죄를 알려 주는 것이 순서적인 교훈이라고 볼 수 있다.
 
  3대지 : 예배를 가르치심 (20~26)

  첫째 : 바로 알고 예배하는 것을 가르쳤다 (20~22)

  사마리아가 된 원인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남방 예루살렘의 예배를 반대하고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짓고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예배했으므로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는 것보다도 진노하셔서 북방 이스라엘을 떠날 때에 자동적으로 사마리아가 되고 만 것이다.
  남방 예루살렘은 버리지 않고 북방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말씀을 순종치 않을 때에 버렸지만 예수님이 유대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시어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어디나 다 같이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을 가르쳤다. 알지 못하고 우상을 공경하던 이방 민족도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알고 예배할 때에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것을 말씀하심 (23~26)

  과거는 여러 가지 의식과 유형적인 예배를 직접 제물로 드렸고 또는 신령한 역사는 나리지 않으므로 받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제물로 희생의 제사를 드리신 후에는 유형적인 제물이나 의식보다도 신령한 은혜를 나리시는 주님 앞에 신령한 은사를 받은 자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중심하여 예배할 때에 은혜 위에 은혜를 더 받게 되고 진리 위에 진리를 더 깨달아 신령한 양식으로 받을 때에 이 예배를 통하여 얼마든지 복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과거의 예배는 지금의 예배를 목적하고 예언적인 형식에 갖춰진 예배였지만 지금은 그 예배의 진리가 완전히 이루어진 열매가 되므로써 신령과 진리로 충만히 받아서 이루어지는 것 뿐이라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대중을 대할 때에는 신령한 도리를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택한 사람을 만날 때에 한 여자를 앞에 놓고 신령한 영생의 물과 신령한 예배를 가르친 것은 너무나 인간이 볼 때에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양식이라고 했던 것이다(요4:32).
 
 




제4과  마르다에게 가르친 말씀
- 요 11:21~27, 39~44,  요절:27 -
 
 서 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중대한 문제를 말할 때에 언제나 인간이 볼 때는 가장 작은 한 사람을 놓고 가르친 교훈을 이 달에는 공부하는 중 마르다에게 가르친 교훈을 공부한다. 마르다는 비록 외로운 고아 중의 한 여자로 자라났지만 가장 예수님을 열심히 받들어 섬긴 여자라고 본다. 그런데 큰 시험을 만나서 주님 앞에 복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인간이 볼 때는 교훈을 받았다가도 다 의심하고 낙심할 정도로 슬프고 딱한 사정을 만난 마르다였다. 왜냐하면 자기 오빠 하나를 믿고 살던 가정에서 둘도 없는 오빠가 죽었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낙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 낙심치 않고 오히려 주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교훈을 받게 되었다.
 
  1대지 :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란 교훈을 받음 (21~27)

  첫째 :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말씀 (21~24)

  주님께서는 택한 자에게 소망이 되는 말씀을 하실 때는 인간으로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자리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나사로가 병들어서 죽은지 나흘이 되는 날에 주님이 오셔서 나사로가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마르다도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나이다 했던 것이다. 교훈이라는 것은 인간이 믿을 수 없는 자리에서 믿게 하는 것이 주님의 교훈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주님의 교훈 그대로 믿어야 하는 것인데 언제나 주님께서는 그 교훈을 믿을 수 없는 난관을 당하게 하고 믿으라는 것이다. 나사로가 죽기 전에 와서 살려주지 않고 죽은지 나흘만에 냄새가 나는 송장을 살려 준다는 말씀은 마르다에게 믿음을 더 길러 주는 말씀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심 (25~26)

  마르다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지만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믿지 못하므로 예수님은 친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이 교훈은 세계 인류에게 큰 소망을 주는 교훈이다. 이 성경 말씀이 즉 성경 전체의 요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씀을 한 여자에게 말씀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다. 원죄와 자범죄로 죽은 자들에게 죽었더라도 살려 주고 주님 올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사람은 죽지않고 영원히 살게 해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의 총 대지가 된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믿는 자라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나갈 소망이 되는 말씀이다.
 
  2대지 :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말씀하심 (39~40)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방법이다. 마르다가 주님을 믿는 마음이 변치 않았지만 무덤에 장사한지 나흘이 되는 오빠가 다시 살아 나온다는 것은 의심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이 부족한 마르다에게 담대히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가르쳤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는 인간으로서는 두려운 맘, 의심스러운 맘, 원망스러운 맘이 날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홀연히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3대지 : 주님의 기도의 교훈 (41~44)
  예수님께서 기도를 하지 않고서도 영광을 나타낼 수 있지만 기도에 대한 교훈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첫째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 라고 하시었다.

  이것은 자기의 힘으로가 아니요, 하나님의 응답으로 된다는 것을 대중 앞에 알게 한 것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보내심을 받아 왔다는 것을 대중 앞에 알게 하는 것이다.

  둘째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고 “나사로야 나오너라” 할 때에 나사로가 일어나 나온 것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믿게 하기 위한 실천적인 교훈이다. 만일 주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고도 이러한 증거가 없다면 어리석은 인간들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음을 아시고 친히 부활의 생명을 믿게 하는 교훈으로 마르다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는 마르다 가정에 준 교훈은 오늘 우리에게 준 교훈으로 알고 용기 있게 나가야만 될 것이다.
 

 결 론
  천하에 제일 큰 일은 마르다에게 준 교훈의 말씀과 증거라고 보게 된다. 전 세계 인류의 끝을 맺는 역사는 마르다의 가정에 나타난 교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사람을 존중히 보는 주님의 교훈을 나가서 전하려면 지극히 작은 여자 하나라도 무시하지를 말아야 할 것이다.
 





 
제5과  도마에게 가르친 말씀
- 요 20:24~29,  요절:27 -
 
 서 론
  주님께서 당신의 종을 들어 그 시대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는 무장을 줄 때에 그 진리를 정확히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할 사도들에게 친히 주님께서 자기의 부활한 몸을 만져 보도록 하신 것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선구자로 나설 자이므로 그 증거를 믿고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본다.
  아무리 예수의 부활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 몸을 친히 만져 보기 전에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 할 때에 문을 열지 않고 주님이 나타날 때 모든 사람은 혼령인가 의심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눅24:37). 그러므로 주님을 만져 보지 못한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가르친 것이다.
 
  1대지 :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오심 (24~26)
  주님께서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 온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사도적인 자격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다른 제자만 주님을 만져 보고 도마는 만져 보지 못한다면 동등한 자격이 없으므로 찾아 온 것이다.

  둘째 : 사도들은 한 단체를 이루어야 될 것이므로 하나같이 부활한 주님을 만져 보았다는 증거를 하기 위한 목적이다.

  셋째 : 이때는 뚜렷한 문서 운동이 없고 친히 본 자들이 증거해서 완전한 성경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기록한 다음에는 그 성경대로 믿어서 천하 사람을 구원을 받게 하시기 때문이다.
 
  2대지 :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심 (27)
  사도가 되는 사람이 부활을 의심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일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야 남에게 믿으라고 증거할 수가 있을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도 있고 이루어진 것을 믿는 것도 있으니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분명히 부활한 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더 큰 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행할 일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므로 믿게 할 수도 있지만 행하신 일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 중에 제일 큰 죄는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죄이다. 지금 성신이 역사하는 데도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더 큰 죄가 될 것이니 성신이 강림하기 전에 주님께서 40일간 계속 나타난 것은 부활을 증거 할 종들을 담대하게 해서 성신 권능을 받아 선구자로 쓰기 위한 목적이다. 성신이 강림한 후로는 주님이 부활을 믿으라고 나타난 일이 극히 적은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성신만 받으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져 본 것보다도 더 확실한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3대지 :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이 있음 (28~29)
  누구든지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를 받고 믿는 사람들은 아무리 죽은 영이라도 즉시 중생을 받고 성신을 받아 하나같이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참으로 복 있는 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예배를 드린다는 사람들이 부활을 증거 못하도록 하다가 예루살렘이 황폐화되었고 금일에 세계 모든 족속이 부활하신 예수를 의심없이 믿으므로 축복을 받게 된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라고 보게 된다.
  모든 죽은 영들이 십자가 부활을 믿으므로 무조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오묘한 일이므로 하나님이 택한 자 외에는 믿을 수가 없는 일이다. 금일에 와서 주님의 부활을 믿으므로 중생 받은 자들이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되므로 받는 복은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없는 일이다.
 
 결 론
  천하에 제일 큰 일이 십자가 부활이요, 제일 큰 축복이 십자가를 믿으므로 구원을 받게 되고 또 증거하므로 믿고, 믿음으로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을 다 주므로 당신의 만족을 삼고 영광으로 받으시려는 것이 사랑의 자체가 되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본다. 우리는 부활을 믿도록 친히 찾아오면서 믿으라고 하시던 주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의심 없는 믿음으로 그 주님께 순종하는 것 뿐이다.
  • ?
    독청수복 2022.03.30 05:46
    천하에 제일 큰 일이 십자가 부활이요, 제일 큰 축복이 십자가를 믿으므로 구원을 받게 되고 또 증거하므로 믿고, 믿음으로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이라고 본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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