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주님의 간절한 소원 - 요 17:24~26 -

by 새일 posted Jul 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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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주님의 간절한 소원  

- 요 17:24~26 -  

 

서 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따라서 믿어야 할 것이다. 주님을 알기도 하고 믿기도 하고 섬기기도 한다면서 간절한 소원을 모른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남편을 섬기는 아내가 남편의 간절한 소원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그 가정은 참된 평화의 행복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영적 신랑인 주님을 모시는 신부된 자로서 그 소원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참된 평화와 행복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간절히 소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주님 계신 곳에 함께 있기를 원하심 (24)  

우리는 이 사랑의 심정을 믿는 신앙이 강해야만 될 것이다. 주님은 인간을 볼 때 당신이 계신 영광의 화려한 나라를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인간을 그 나라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에서 불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심정에서 세상에 오셨고 또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만찬석을 베푸신 후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올린 것이 내게 주신 자를 나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므로 이미 성경이 응하기 위한 가룟유다 외에는 한사람도 떨어지지 않고 그 나라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된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조금이라도 희미하게 안다는 것도 주님이 노할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나의 나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뿐이라는 것을 어디 가나 자랑했던 것이다.

이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참으신 것이니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20세기 반기가 지나도록 참고 기도하는 심정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구는 구원을 받는다 못 받는다 판단한다는 것은 교만 중에도 교만이요, 주님보다도 더 높다는 교만이 될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 소원을 위하여 죽으셨다면 우리도 형제를 이 곳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종의 심정일 것이다.

또는 주님께서 이 날까지 실수가 있어도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도 이와 같은 심정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주의 종이 자기만 구원받을 자신이 있다고 하며 남은 구원 못 받는다고 판단하는 것은 사단의 자식의 행동일 것이다.  


2.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하신다 (25~26상반절)  

주님은 당신의 사랑이 그 마음에 있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있는 자의 기도라면 그 기도를 듣고 싶어하는 심정이요, 구하는 것 외에 더 주고 싶은 심정이 주님께 있는 것이다. 기도란 주님과 인간과의 교통하는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임할 때 오르락 내리락하는 영적 교통은 어느 곳이나 장소의 차별 없는 교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나 주님에게만 사랑이 있다는 것이 아니요, 그 사랑이 각 사람의 마음에 임재하여 역사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포도나무 그루터기에서 오는 진액이 순에 충만함 같이 예수님께 있는 사랑이 마음에 충만해 질 때 열매는 자동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3. 주님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하심 (26하반절)  

주님은 거룩하고 위대하신 주님으로서 죄인의 마음 가운데 함께 있기를 원하는 심정이다. 죄인의 마음에 와서 거해 달라고 하여도 올 수가 없는 것이 주님 자체다. 그러나 주님은 자청하여 마음 가운데 오기를 원하는 것이다(요一4:13).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는 것은 당신과 같은 형태를 이루기 위한 소원이니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우리의 노력이 합하여져서가 아니고 먼저 주님이 내 마음 안에 오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것은 행함으로 받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에 오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완전치 못한 사람을 완전케 만들려는 심정에서 찾아오는 것이니 누구든지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이 오셔야만 내가 산다는 마음 하나 뿐이라야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은 이러한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자기라는 것을 그대로 두고 주님을 오시라고 할 때는 들어 올 수가 없을 것이다. 주님 한 분밖에 없다는 마음에 오시는 것이니 영광도 생명도 축복도 주님 내 마음에 오심으로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족함이 없다 함으로 주님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던 것이다.  

 


결 론  

우리의 완전이라는 것은 자체로써는 추호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주님이 소원하는 바를 믿음으로써 완전한 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신자가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과는 원수가 될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계신 나라를 주고 싶어서 죽기까지 애를 쓰시는데 그 나라 것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십자가의 원수가 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오는 것보다도 어떤 사람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요구한다면 이것도 주님과는 원수가 된다. 주님이 마음 가운데 오시는 것을 원하는 것보다도 자기를 숭배하고 영화롭게 할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바벨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은 주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세 가지 요소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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