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

  

    [ 1장 - 10장 ]

 

  11 장

1. 하나님의 영광을 본 가정 (요11:17~44)

2. 열매 있는 기도의 세 가지 요소 (요11:40~44)

 

  12 장

1. 예수를 위한 연회와 신앙의 차이점 (요12:1~11)

2. 희생과 열매 (요12:23~33)

3. 희생과 열매 (요12:24~36)

4. 예수를 섬기는 자의 인격 (요12:24~26)

5. 제일로 영광스러운 일 (요12:27~33)

6.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차이점 (요12:41~43, 13:12~20)

7. 심판할 이는 말씀 (요12:44~50)

8. 주님의 말씀과 심판 (요12:46~50)

 

  13 장

1. 주와 우리와의 상관될 이유 (요13:8)

 

  14 장

1. 다시 오실 주님의 심정 (요14:1~4)

2. 인생의 근심할 일과 믿을 일 (요14:1~3)  

3. 기독교 신앙의 위력 (요14:6~13)

4. 기도 응답과 영광 (요14:10~14)

5. 기도 응답의 삼대 의의 (요14:14~17)

6. 참된 평안 (요14:23~31)

7. 예언과 신앙 문제 (요14:25~31)

 

  15 장

1.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 (요15:1~8)

2. 열매를 바라는 포도원 농부의 심정 (요15:1~5)

3. 예수의 친구 된 자격 (요15:7~20)

4. 주안에서 나타나는 열매 (요15:7~11)

5. 말씀 충만과 기도의 열매 (요15:7~10)

6. 제일 큰사랑 (요15:9~17)

7. 사랑과 기쁨 (요15:9~14)

8. 주님의 선택과 역사 (요15:16~20)

9. 성령의 증거와 종의 증거 (요15:25~27)

10. 진리의 성령의 역사 (요15:25~27)

 

  16 장

1. 교회 안의 분쟁은 왜 있을 것이냐 (요16:1~4)

 

  17 장

1. 아들의 영화와 아버지의 영화 (요17:1~7)

2. 때가 올 때 영화롭게 되는 일 (요17:1~2, 사24:13~15, 60:5~9)

3. 예수님의 창세전의 영화와 말세 영화 (요17:5)

4. 하나 되게 하는 역사 (요17:11~26)

5.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 역사 (요17:21~24)

6.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되게 하는 역사 (요17:21~26)

7. 주님의 간절한 소원 (요7:24~26)

 

  18 장

1.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신 예수 (요18:1~11)

2. 충성된 증인 예수 (요18:33~38)

3. 진리를 증거하는 예수 (요18:33~38)

 

  19 장

1. 위에서 준 예수 (요19:1~11)

 

  20 장

1.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평강 (요20:19~23)

2. 복 있는 믿음 (요20:26~29)

3. 성경을 기록한 목적의 차이점 (요20:30~31, 계22:6, 16)

 

  21 장

1. 주님의 역사와 인격의 차이점 (요21:1~6, 행3:1~10)

2.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 차이점 (요21:15~25)

3.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적 한계 (요21:15~25)

4. 주 재림시까지 머물게 한 사명 (요21:21~23)

 

 

하나님의 영광을 본 가정

- 요 11:17~44 -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어 많은 가정을 친히 방문했지만, 나사로의 가정을 제일로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는 슬픔의 가정, 낙망의 가정이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 없는 고아들이 나사로 하나를 믿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그 날 그 날을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런데 두 딸을 두고 한 독자를 불러 가신 하나님 앞에 이 가정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만한 가정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슬픔과 낙망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가정은 어떠한 가정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원망치 아니할 일 (17~21)

  인간이 생각할 때에 원망할 일은 어느 때는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늘 와서 유숙하시면서 많은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어 갈 때에 아무리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도 예수님은 오시지를 않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나사로는 죽게 되고 말았다. 죽은지 나흘에 가서야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을 찾아 올 때에 한 마디의 원망이 없이 마르다는 “주께서 여기 계셨다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는 말로 평화스럽게 말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여자로서 경솔하지 않고 말 한 마디 불평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던 것이다. 금일에 와서 너무나 경솔한 여자가 교회에 많다고 볼 수 있다. 무엇이 조금만 불만해도 입으로 불평을 토하고 조금만 자기에게 불리하면 입으로 악담을 하는 여자가 많은 세상에서도 마르다와 같은 믿음이 있는 자라면 반드시 영광을 보게 될 것이다.

 

  2. 변치 않고 믿는 일 (22~24)

  믿음이라는 것은 낙망될 일이 와도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질 적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영광을 나타낼 때는 택한 자의 믿음을 달아보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데는 변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라야 하나님은 인정하시고 홀연히 역사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믿음 (25~27)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역사하는 것이다. 아무리 믿는다 하여도 완전성을 믿지 않을 때는 완전한 역사는 응답으로 올 수가 없다.

 

  4. 부활의 영광을 봄 (39~44)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썩어서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무덤에서 일어나 나온 일이다. 이것은 전 세계 인류에게 큰 소망을 주는 일이다. 나사로의 부활이 있으므로 그 즉시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된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만 전 세계 인류에게 예수는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나사로를 말미암아 더욱 확신하게 된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주님 다시 올 때에 한마디 음성에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살아남은 자는 변화를 받을 것을 확실한 증거로 나타났다. 인간이 볼 때는 아무런 존재가 없는 가정이지만 주님께서 그 가정을 통하여 큰 영광을 나타낸 것은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영광을 나타낼 가정을 예표적으로 보여준 일이라고 보게 된다.

 

  결 론

  가장 복된 가정은 아무리 외롭고 가난하고 비천한 생활이라도 주님이 인정하는 가정일 것이다. 언제나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주무시지 않고 친히 도보로 걸어서 베다니 나사로의 집을 찾아가 주무셨다는 것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정하는 가정은 모략적으로 까불어 본 일은 더 큰 영광을 나타낼 징조였던 것이다. 잠깐 동안 슬픔의 사망이 왔고, 괴로운 병마가 왔지만 이것은 죄 값으로 오는 질병과 사망 가운데서라도 인정받는 가정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준 일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슬픔과, 낙망이 없이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슬픈 일, 낙망할 일이 와도 원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고, 주님의 완전성을 믿고 나갈 때에 주님은 친히 찾아 오셔서 썩어진 냄새나는 몸을 일으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던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죄값으로 썩을 몸이라도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나타내려면 나사로의 가정을 본받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열매 있는 기도의 세 가지 요소  

-요11:40~44-

 

서 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든지 기도를 통하여서만 역사하는 것이니 어떠한 기도를 해야 하나님은 역사하신다는 것을 본문에서 세 가지로 배울 수 있다.   

1. 이미 들으신 것을 감사하는 기도 (41)  

하나님께서는 일을 나타내기 전에 먼저 뜻하시고 계신 경륜이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은 택한 자에게 어려운 일이 없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게 하시는 것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받고자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사로를 향하여 기도할 때에 먼저 감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기도할 때에 먼저 하나님의 뜻과 경륜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도할 것이다.   

2. 항상 들으시는 줄 아는 것이다 (42상반절)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반면에 그 뜻을 이루는 것은 그 때 그 때에 따라서 호소하는 기도를 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호소 없는 일에 역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운 법이기 때문에 예를 든다면 국가에 큰 일이 있을 때 백성이 단결하여 호소하는 것을 따라 움직이는 일이 있는 것과 같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호소가 없다면 그 일을 막기 위하여 법에서 출동할 수 없는 것과 같다.   

3. 기도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42하반 절)  

그러므로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려내기 위한 기도는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다. 만일 기도하는 정신이 대중적인 유익을 목적하지 않고 개인적인 욕망을 가진다면 큰 역사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당신의 무소불능의 힘을 나타낼 때 인간은 절망 낙망의 슬픔을 머금고 있는 자리에서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큰 뜻이 되는 것이다.

 

예수를 위한 연회와 신앙의 차이점

- 요 12:1~11 -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 즐거운 연회를 이룬 일이 있었다. 이것은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일에 대하여 기쁨으로 열려지는 연회이었다.

  이런 연회는 세상에서 드문 연회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연회를 놓고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의 그 신앙 차이점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생각할 때에는 죽어서 장사를 지낸지 나흘 만에 나사로가 살아나는 증거를 볼 때에 회개하고 마음이 하나가 될 것 같았지만 이러한 자리에서도 믿음에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었다.

 

  1. 마르다와 마리아의 상태 (1~3)

  인간이 볼 때는 훌륭한 성직을 가진 자도 아니요, 훌륭한 성직을 가질 자격도 없는 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은 어느 누구보다도 크다는 것을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오라비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에 마르다는 조금도 원망이 없었고, 부활한 후에도 더욱 열심을 얻고 주님을 모시고 즐거운 잔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물심양면으로 봉사하는 생활을 하였다. 몸으로 고생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봉사하였고 물질로도 아낌없이 할 때에 향기로운 기름을 예수님께 붓고 심지어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너무나 지나친 것 같지만 그 중심이 얼마나 간절하다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정도였다.

 

  2. 가룟 유다의 상태 (4~6)

  인간이 볼 때는 정당한 말을 하고 사무적인 처리도 명랑하게 하는 것 같았으나, 실지는 도둑의 사람이었다. 자기는 연보궤를 맡아 가지고 돈을 훔쳐 가는 일이 있으면서 마리아에게 책망하며 하는 말이 '이 향기로운 기름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얼마나 좋은 일인데 예수님의 몸에 기름을 붓는 것은 필요 없는 일이 아닌가' 하면서 역설했던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이것이 합당한 말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저히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다니면서 이적 기사를 보고 직접으로 교훈을 받으면서도 성금을 훔치는 일이나 양심에 가책도 없이 뻔뻔스럽게 빈민을 구제한다는 미명을 쓰고 말한다는 것은 가증한 말이 아닐 수 없다.

 

  3. 구경하려고 모여든 무리의 상태 (9)

  진리를 말할 때는 대중이 따르지 않았지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훌륭한 잔치를 베푼다고 하니 큰 무리들이 구경을 하려고 모여들게 되었다. 실지 알고 보면 죽은 나사로가 산 것이 인간에게 유익되는 것이 아니요, 주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건만 말씀보다도 살아난 나사로를 구경하기 위하여 모여들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죽은 나사로를 무덤 밖으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 것을 직접 본 많은 무리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대중을 선동시켜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말씀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는 다 배반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하는 일이 있었다. 이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치 못한다'고 하면서 조롱을 했던 것이다. 이것이 진리를 따르지 않고 이적을 따르는 무리들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4. 나사로까지 죽이려는 대제사장들의 상태 (10)

  소위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라 하는 무리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를 하니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는 사단의 회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본다면 교권이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이방 사람이라도 이렇게 악한 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직자라 하면서 공연히 남을 해치려는 자들을 주님께서는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던 것이다. 기독교 종말의 최고 악은 거짓 선지가 짐승의 표를 받지 않으면 누구든지 다 죽인다는 것이다.

 

  결 론

  슬프다. 이스라엘이여!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성전에 악당들이 충만했고 거룩한 예루살렘 거리에는 벌레 떼같이 많은 인간들이 아무런 진리를 모르고 공연히 왕래하는 것은 가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베다니 동리의 외로운 가정에 고아인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가 복 있는 사람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우리는 주님을 위한 즐거운 연회 속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의 차이점을 볼 때에 현 교계를 회상해 볼 필요가 있다.

 

희생과 열매  

- 요 12:23~33 -

 

서 론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희생과 열매라는 떠날 수 없는 관계가 있게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은 사람을 위하여 희생을 당하도록 창조한 것이다. 희생자가 없다면 생명을 이 땅에서 보존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계의 진리다. 간단히 말하면 물이 희생을 당하지 않으면 사람이 목마름을 면할 수 없고 식물의 열매가 희생하지 않으면 사람은 배고픔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세밀히 말하면 식물이나 동물도 서로 희생이 있음으로 식물도 열매가 있고 영계에 대한 진리도 희생이 있음으로써만 열매가 있다는 것을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린다고 말했다 (25)  

이것은 이 땅에서 진리를 대적하는 원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생이 득죄함으로써 세상은 극도로 악화된 것이므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의를 위하여 싸우는 자를 영생하도록 보전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생을 아무에게나 줄 수 없고 희생적인 충성과 진실이 있는 자에게만 주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자기 목숨을 ‘ 바치느냐’ ‘안 바치느냐’ 라는 것을 알아보려는 모략적인 시험을 주는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니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종이 된 그 정신을 가진 자라야 주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다 (26)  

만일 어떤 종이 자기가 섬김을 받아 보려는 정신이 있다면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을 섬기는 자들을 아무리 죄가 있어도 귀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의식이 아니요, 양심이니 이 양심은 남을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섬기는 양심이다. 섬긴다는 것은 희생이 따르지 않고는 외식이 될 것이다.   

3. 인간 최대의 영광은 희생에 있다는 것이다 (27~28)  

그러므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하늘을 향해 호소하기를 “아버지여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할 때에 하늘로부터 영광스럽게 하겠다는 음성이 우뢰같이 들렸던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함으로써 영광스러워 진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와서 십자가의 희생이 있으므로 영광스럽게 된 것이니 이것은 최대의 영광이다. 우리는 최대의 영광은 진리를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데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결 론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볼 때에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시되 자기를 위하여 희생적인 각오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검토한 후에야 사람으로 열매를 맺도록 역사를 해주는 것이 공의가 있는 주님의 사랑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따른다 하면서 자아를 희생하는 것이 없다면 이 사람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쭉정이가 되고 말 것이다 .  

 

희생과 열매

- 요 12:24~36 -

  

  열매라는 것은 희생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식물이 열매를 맺는 것도 땅에서 희생적인 것이 있으므로 열매가 되고 몸이 움직이는 것은 열매가 희생하므로 움직이는 것이요, 영적 활동이 있는 것도 희생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희생과 열매에 대하여 본문을 들어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식물의 희생과 열매 (24)

  밀 한 알이 희생할 때에 많은 열매가 나타난다. 언제나 희생이 있음으로 식물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것인데 이 열매는 사람을 돕는 열매가 된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식물의 열매를 마음대로 먹으라고 허락을 한 것이다(창1:26 ~29). 모든 식물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쉬지 않고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식물이다. 그러므로 사람 하나를 위해서는 모든 만물이 다 희생을 당하도록 하신 것이 창조의 원리이다.

 

  2. 사람의 희생과 열매 (25~26)

  사람이 식물의 희생적인 열매를 먹고도 자기가 할 의무를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죄가 되는 것이다. 의무라는 것은 진리를 위하여 희생적인 생활이 있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긴 사명이다. 조물주께서 모든 식물을 사람에게 주고 사람은 진리를 위하여 희생적으로 나가는 자라면 반드시 책임을 지고 그 사람을 보호하며 그 사람을 위하여 싸워 주는 역사를 하실 뿐만 아니라 큰 축복을 주신다. 축복이라는 것은 세세 왕권의 축복이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아무런 희생적인 생활이 없이 식물의 열매만 먹고 살라고 내었다면 사람은 한 동물에 불과할 것이로되 사람에게는 진리의 법을 주고 그 법을 지키기 위하여 희생적으로 나가야만 완전한 열매를 맺도록 한 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진리를 대적하는 세력에게 권세를 주어서 진리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으로 승리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아무리 진리 대적이 강하다 하여도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므로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신다.

  하나님이 가장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예수님을 섬기는 자이다. 왜냐하면 예수를 세상에 보낸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니 그 왕국을 이루기 위해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자라야 그 왕권의 영광을 같이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법을 세우지 않고는 진실한 사람을 찾아서 존귀케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진실한 사람을 존귀케 하기 위하여 희생이 없이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게 원수를 들어 쓰시는 것이다.

 

  3. 예수님의 희생과 열매 (27~36)

  희생이라는 것은 자기 원대로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순종하는 것을 희생이라는 것이다. 예수님도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할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하시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희생이 있음으로써만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 있는데 첫째로 마귀를 이기게 되고, 둘째로 모든 사람을 인도하게 되고, 셋째로 모든 사람을 빛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열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첫째 :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사53:10)

  하나님은 할 수 없이 아들을 희생시킨 것이 아니고 원하시므로 하시었다. 왜냐하면 아들이 희생을 당함으로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첫째아담을 통하여 모든 것이 완전하게 되었다면 성부 , 성자, 성신님께 영광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독생자가 희생하므로 성부, 성자, 성신께 영광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둘째 : 영광스러운 일이다 (요12:28~29)

  세상에 많은 사람이 영광을 누려 보려고 전쟁도 했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예수님같이 영광스럽게 된 자는 없는 것이다. 인간 생활에는 고생 중에 고생이요, 낮아진 중에도 비천해진 일이고, 실패 중에도 실패라고 볼 수 있지만 영광 중에 영광이 된 것이다.

  한 사람이 죽으므로 세계가 살고 한 사람이 죽으므로 하늘에 서 기뻐하고 땅에서도 기뻐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신성으로만 계셨다면 무슨 영광이 되며 세상에 와서 한 자선가나, 정치가가 되고 말았다면 그것이 무슨 영광이 될 것인가! 그러나 만국 만민의 죄를 위하여 제물이 되었다는 것이 세세 영원토록 영광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셋째 : 완전 승리의 심판을 이룬 일이다 (요12:31)

  심판이라는 것은 마귀를 이기는 것이니 십자가의 승리가 없었다면 마귀를 이기는 일이 못되고 천지를 창조한 것은 마귀를 기쁘게 한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마귀를 공경하며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승리가 있으므로 인간들은 마귀 권세에서 해방이 되고 완전한 왕국이 이루어지므로 마귀 세력을 완전히 이 땅에서 없애기 때문이다.

 

  결 론

  희생과 열매라는 것은 대자연을 창조한 하나님의 법의 요지가 된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나 희생이 있음으로써만 열매를 맺게 한 것이 창조의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섬기는 자의 인격

- 요 12:24~26 -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을 섬기든지 섬기는 일에 따라서 그 인격이 좌우된다. 왜냐하면 섬기는 일에는 항상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무 목적도 없이 무엇을 섬긴다면, 이것은 광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섬기는 자의 인격이 얼마나 존귀하다는 것은 본문을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1.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인격이다 (24~25)

  사람의 인격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주관하지 못하는 것이요, 누가 내 생명을 주관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타락한 인생이다.

  그러므로 내 생명을 내가 사랑함으로가 완전이 아니요, 주님께서 내 생명을 사랑해 주는 것으로만 내게 완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만족이라는 것을 깨닫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자는 주님께서 영생하도록 보존하시므로 영생할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완전한 인격이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 속에서 보호받는 자 외에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 예수님을 따라가는 인격이다 (26상반절)

  인생이라는 것은 길을 가는 사람과 같은 생활이니, 누구든지 가지 않을 수 없이 가게 되는 것이 인간의 생활이라는 것이다. 어느 사람이든지 누구의 인도를 따르지 않는 자는 전혀 없다. 우리가 누구를 따라가야 “나”자신이 완전해진다는 것을 안다면 거기서부터 바로 사는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지만 예수님을 따라가는 인격을 가진 자는 많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라”고 하셨던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예수를 따라가는 실천 생활이 없다면 신앙의 인격을 가질 수 없다. 인격이라는 것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실천 생활에 있는 것이니, 누구든지 예수를 따라가는 자라야 예수님이 있는 곳에 영원히 같이 있는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따라오는 자를 온전케 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지 극히 낮은 자리에서 지극히 높은 자리로 걸어 가셨고, 지극히 괴로운 자리에서 평강의 세계를 향하여 걸어 가셨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걸어가신 것은 따라오는 자에게 자기와 같이 되는 인격을 이루어 주기 위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자는 그 시간부터 인격적인 산 체험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인격적인 체험을 받은 자라야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기에 용감한 생활을 하게 된다.

 

  3.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는 인격이다 (26하반절)

  조물주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장 귀하게 창조하셨고, 가장 귀하게 쓰시는 동시에 가장 귀하게 영광을 주고자 하시는 것이 완전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가장 귀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귀한 사람을 세상에 보낸 것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섬기는 자라면 아무리 어리석고 더럽고 약하고 가난한 자라도 예수와 같이 되게 하기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성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대제사장이라도 예수를 섬기지 않기 때문에 찍어 버렸고, 아무리 불학무식한 베드로라도 예수를 섬기기 때문에 예수와 같이 귀하게 들어 쓰셨던 것이다. 나는 체험에 의하여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자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귀하게 들어 쓰신다는 것을 믿는 바이다.

  주님께서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섬기는 것은 당신을 섬기는 것과 같이 인정하시고, 친히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사람을 섬기던 이 사람에게 홀연히 큰 은혜가 오기 시작되어 얼마든지 주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인격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때에 더욱 감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수고가 있으리만큼 하나님께로부터 귀한 은혜를 받게 될 때에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결 론

  오늘에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섬기는 것을 불행스럽게 알고 오히려 비방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그 인격이 어리석고 어두운 가운데 있는 증거라고 본다. 우리는 예수를 섬김으로만 완전이라는 것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이미 받은 체험으로도 확실하지만 더 크게 받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가장 위대한 인격은 예수님을 섬기는 열심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일로 영광스러운 일

- 요 12:27~33 -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로 영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될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많은 사람을 자기 앞으로 굴복시키므로 자기 권세를 꺾을 자가 없이 되면 그것을 영광스러운 일로 알고 있다. 이것은 인간들의 본질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지면 부끄러워하고, 이기면 영광스럽게 알고 남보다 낮아지면 부끄럽게 알고, 높아지면 영광스럽게 아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로 영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본문을 보아서 알 수 있다.

 

  1.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일이다 (27~28)

  사람이 자기 집안에 가만히 앉아서 있다는 것은 아무런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수 없고, 집을 떠나 활동을 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사람에게 제일로 수치스러운 일은 옥에 갇혀서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에서만 영원히 있다는 것은 아무런 영광스러운 일이 있을 수 없고, 그 영광의 자리를 떠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이 없이 하나님 앞에만 있었다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인지를 알 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아무런 영광도 나타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군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찬송을 불렀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베들레헴 말구유에 누워 있다는 것은 인간들이 보기에는 부끄러운 일 같지만,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일이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지극히 높으신 자가 지극히 낮은 자리를 찾아 왔다는 것이 지극히 영광스럽게 될 시작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지극히 낮은 자리에서부터 점점 더 올라가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 누워 있을 때부터 억울하게 환란을 만나는 일이 있게 되었지만 이것은 영광을 나타내기 시작하는 싸움이었다. 그리고 헤롯 왕이 어린 아기인 예수를 죽이려고 군사를 동원시켰지만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셨고, 헤롯 왕은 그 몸이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 언제나 영광스러운 일은 침략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침략을 당한 사람에게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침략을 당한 자에게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남을 해코자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일이요, 남을 살리고자 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왔다는 것이 예수님께도 영광스러운 일이 되었고, 하나님께도 영광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영광스러운 보좌 위에 계신다 하여도 인간 세상에 아들을 보내신 일이 없었다면 세상에서는 영광을 받으실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창조를 받은 인간들이 하나님보다도 마귀를 섬기는 일이 더 많은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가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된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위하여 보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대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같이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시고 네가 뉘 죄든지 정하면 하늘에서도 정하여 지고, 사하면 하늘에서도 사하여지리라고 하신 것이 사람으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기를 낚던 어부인 베드로가 이렇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다(요20:21~23).

 

  2. 마귀를 이기게 된 일이다 (29~31)

  첫째아담 하나가 마귀에게 지므로 인간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시작된 것이요, 둘째아담 예수님 한 분이 마귀를 이기시므로 인간들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시작된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승리하신 일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는 마귀를 이길 수 없는 세상을 어찌할 수 없이 되었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한 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마귀를 이기는 심판 권세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고 하는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이것은 첫째 : 하나님의 아들이 도성 인신하여 세상에 온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요, 둘째 : 십자가에 죽어서 마귀를 이기게 된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 한 몸이 죽어서 영광스럽게 되는 일은 예수님 밖에는 이런 일을 할 자격을 가진 사람이 없다. 세상 사람이 아무리 높다 하여도 자기가 죽어서 마귀를 이길 자가 없고, 사람이 마귀에게 졌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부끄러운 죽음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다.

 

  3. 많은 사람을 이끄는 일이다 (32~33)

  세상에 많은 영웅들이 일시적으로 사람을 이끄는 일이 있었지만 이것은 아무런 열매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기가 죽어서 마귀를 이기고 많은 사람을 이끄는 것은 영원한 천국을 이루되 세세왕국을 이루는 일이니 이것이 제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소위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이 일시는 영토를 넓히고, 영광스러운 일같이 자랑했었지만 그 결말은 남을 죽인 것 같이 자기도 원수에게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죽어서 세계 통일의 왕국을 이루는 것은 다시는 누가 침략할 수 없으므로 영원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네가 나를 따라 오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다. 이와 같이 고기를 낚아 먹던 베드로가 한번 설교할 때에 3천명이 회개하게 되는 일에서부터 세계 사람을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는 열쇠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

  말세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중에서 종말의 진리를 바로 증거하여 환란과 재앙 가운데서 많은 사람을 이끌어 내어 새 시대로 인도하는 일도 영광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사49:21~23).

 

  결 론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영광스럽게 되어 보겠다는 것이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되어야 영광스럽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꿈을 꾸는 사람같이 허무한 생활을 하다가 후회막심이라는 비극을 이루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일로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 무엇인 것을 바로 알아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차이점

- 요 12:41~43, 13:12~20 -  

 

서 론  

기독교 신앙에는 다 하나같다고 볼 수는 전혀 없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동일하게 본다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다.   

이제 믿음에 있어서 본 성경과 같이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1. 믿음이 있고도 교권을 무서워하는 자 (12:42~43)  

믿음이라는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미약한 자도 있고 장부와 같은 자도 있는 것이니 믿어도 교권주의를 무서워하는 그 믿음은 아무런 역사를 할 수 없는 신앙이다. 이것은 소위 숨어서 마음으로 믿는다는 정도에 있는 사람이다. 만일 이런 사람만 교회에 있다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교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앙을 가진 자에게 역사를 내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과거도 지금도 장차도 있을 것이다. 평교인으로서 이런 자가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소위 사명자라는 자로서 이러한 자가 된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적군이 무서워서 골방에 가서 숨어 있는 군대와 같다.   

2. 사랑을 받으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자이다 (13:18)  

이러한 분자는 가룟 유다와 같은 독사의 자식이다. 성찬에 참석하여 떡과 즙을 받고도 짐짓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자이다.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린 자는 사단이 그 속에서 자리 잡고 역사하는 것임으로 13:26~27과 같이 멸망을 자취하는 자가 된다.   

3. 주님의 겸손을 본받는 자가 될 것이다 (13:14~17)  

신앙이라는 것은 주님께 받은 사랑을 남에게 주는 것이 열매 있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소유한 종 된 생활이다. 신앙이 크다는 것은 이것을 가리킨 것이다. 가장 겸손한 신앙이 있으면 가장 높은 자리를 점령하는 큰 역사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극도로 겸손한 자리에 떨어뜨리고 극도로 높은 자리를 주신 것이 아들을 사랑하는 증거이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도 사랑하는 참된 종을 극도로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올려놓는다는 것이 사랑하는 자에게 있는 비밀의 하나이다. 너희 믿음이 겨자씨만 하면 산이라도 옮겨진다는 것은 지극히 겸손한 믿음을 가리킨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믿는대로 역사해 주시는 하나님이니 사람을 두려워하는 신앙에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없고 물질을 사랑하는 자의 믿음에 성령 충만을 줄 수 없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섬기는 믿음에 섬김을 받을 수 있는 왕권을 주는 것이다.  

 

심판할 이는 말씀

- 요 12:44~50 -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하나님도 말씀을 따라서 구원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적에 오히려 슬퍼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 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말씀을 세우신 다음에 말씀을 따라 행하는 것이니 아무리 사랑을 하려고 해도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를 사랑할 수도 없고 아무리 복을 주려고 해도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에게 복을 줄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은 슬퍼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였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은 항상 말씀을 순종치 않는 인간들을 불쌍히 보는 심정을 가진 것이다. 이제 말씀이 심판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주님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빛으로 세상에 오심 (46)

  빛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을 알려주는 것을 뜻한 것이니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대신 죽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 말씀 하나를 바로 알도록 하는 일에 전력을 두고 역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한 사람이 앞에 있다 하여도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말씀을 바로 말해 주기 위하여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역사했다.

  니고데모라는 청년 하나를 놓고 가장 중대한 진리를 말한 것이 요한복음 3장이요,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을 앞에 놓고 영생의 물을 말해 준 것이 요한복음 4장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친히 걸어가시면서 말씀을 가르칠 때는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데리고 길을 가면서 성경을 가르친 사실, 유대인이 무서워서 숨어있는 제자를 찾아가 마음을 열어 주면서 성경을 깨닫게 하시며 사명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 하나를 백성들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노력하신 것이니 누구든지 주의 종이 되려 할 때 말씀 하나를 바로 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면 예수와 같이 왕 노릇하는 것이다(계20:4). 그러므로 말씀을 밝힐 때에 빛이요, 말씀을 바로 전하지 못할 때에 흑암이다(사8:20).

 

  2. 세상을 구원하러 오심 (47)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죽으시는 주의 심정은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한 것은 메시아가 오신 목적을 말한 것이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길이 참으시면서 대언 기도하는 것은 자기가 십자가에 죽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니 택한 자를 구원하여 수가 찰 때까지 정죄하지를 않으시고 용서해 주기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주님이시다.

 

  3. 그 말씀이 마지막 날에 심판함 (48)

  심판이라는 것은 구원코자 하여, 말씀을 믿으면 구원하고 믿지 않으면 멸망하리라는 말씀에 의하여 끝을 맺는 것이니 인간 자체는 멸망할 사람인데 믿으란 말을 순종치 않을 적에 자동적으로 말씀대로 망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믿어도 믿지 않아도 여기에 일반으로 취급한다면 그것은 말씀으로 심판하는 일이 되지 못할 것이로되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구원해 준다면 순종치 않는 자는 구원하지 않는 것이 공의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심정이 심판하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면 주님 자체는 사랑이라 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남이 죽는 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악한 마음이 될 것이다. 하물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심판하기를 원한다는 마음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4. 아버지 말씀대로 이루시는 예수님 (49~50)

  예수님은 조금도 자유로 말하지 아니하고 친히 아버지의 명령대로 이루는 것뿐이니 그 명령 자체가 영생이라고 했다. 이것은 인생을 구원하기 위하여 명령하신 그 명령을 순종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만일 아들도 그 명령을 순종치 않았다면 만 왕의 왕이 될 수가 없을 것이로되 충성된 증인으로 끝까지 순종했기 때문에 만왕의 왕이 되신 것이다(계1:5). 그러므로 예수님은 절대 “나는 구원을 위하여 순종하는 것뿐” 이라는 것을 말씀하면서 심판할 이는 말씀이라고 했던 것이다.

 

  결 론

  말씀이 있는 동시에 그 말씀에 의해서 행하는 것이 심판이라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신이 신앙의 대상자가 되는 것은 그 자체는 사랑이신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말씀을 세우시고 그대로 행하는 신이시니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요, 믿지 않으므로 말씀대로 심판의 형벌을 받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과 심판  

- 요 12:46~50 -  

 

말씀과 심판이란 것은 인간을 구원하고 마귀의 세력과 악인을 없애기 위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많은 학설이 있지만 세상을 구원할 수 있고 심판할 수 있는 말씀은 주의 말씀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주님의 말씀은 심판이란 것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주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46)  

심판은 어두움을 그대로 두고 심판하지 아니하며 어두움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참 빛을 비취어 깨닫게 한 후에라야 심판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흑암 가운데 있는 백성에게 빛을 보내지 않고 심판을 한다면 이것은 의로운 심판이라고 할 수가 없다(사49:6, 사42:6, 사9:2).  

2.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47)  

인간 자체의 힘으로는 빛을 받아서 깨달았을지라도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올라올 수가 없으므로 주님께서 오신 목적은 심판을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세상 죄를 친히 짊어진 어린양의 몸으로 대속의 제물이 되어 오신 것이니 믿으면 구원이요, 믿지 않으면 멸망이란 것이 멸망의 대지가 된다. 만일 대속의 구원이 없이 심판을 한다면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복음의 말씀으로 심판을 베풂으로써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3. 주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말씀했기 때문에 (49~50)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오셨으므로 스스로 말씀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명령은 영생을 주는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을 인간에게 숨김없이 가르친 것이다.  

결 론  

그러므로 은혜시대 사람들에게는 은혜시대에 가르친 교훈대로 심판을 하고 환난시대 사람들에게는 환난시대에 가르친 예언의 말씀에 의하여 심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에 가르친 말씀은 은혜시대의 구원을 목적하였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요한에게 나타나 보이시고 가르친 계시록은 마지막 환난과 심판 기에 대한 교훈이다(계22:18).  

 

주와 우리와의 상관될 이유  

- 요 13:8 -  

 

서 론  

우리는 죄를 지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 되어 주님이 행하신 일을 우리가 행한다는 것은 그 상관된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이다 . 이것을 분명히 모른다면 참된 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주님 앞에 수제자 되는 베드로에게 내가 네 발을 씻지 아니하면 너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진리가 있는 것이다.   

1. 주님께서 자청해서 제자의 발을 씻는 심정이 있으므로 상관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동적인 심정에서 어린 자녀에게 단 마음으로 종이 된 생활을 함과 같다. 주님은 당신이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대하여 이러한 심정을 가졌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를 위하여 집을 떠나고 직장을 떠난 베드로에게 이런 심정을 가지고 귀엽게 본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존귀하게 대해 준다는 것이다.  

2. 당신을 대신하여 나서는 종이라면 주님은 봉사하는 심정 속에서 그를 받들어 주겠다는 심정이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그와 같은 심정을 가진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러한 심정이 없다면 주님의 종이 될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종노릇하는 것보다는 거룩한 만왕의 왕 앞에 종이라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당신의 사람을 자기보다도 더 크게 쓰겠다는 심정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그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는 나보다도 더 큰 역사를 일으키는 종이 세상에서 되어 달라”는 심정이다.   

4. 최고의 높은 자리를 주겠다는 심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발을 씻어 주겠다는 것은 얼마나 높으냐" 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주님의 소원은 당신 앞에 쓰여지는 종으로 극도로 높은 영광을 받는 자리를 요구하는 심정이니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을 받은 대로 남에게 줘야 된다는 것이 새 계명이다.  

결 론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는 종으로서의 할 일은 주님께서 귀하게 보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니 종을 그만큼 존귀하게 여겨 주라는 뜻을 가르친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주의 종을 업신여기고 무시한다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겠다니 자동적으로 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이 있는 자는 주의 종을 대접하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했던 것이다.  

 

다시 오실 주님의 심정  

- 요 14:1~4 -  

 

서 론  

완전한 사랑이 계신 동시에 실천을 하기 위한 심정에서 가르친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이다. 주님은 이루어 주고 싶은 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여기에 분명히 나타내셨다.  

1.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1)  

이것은 인간들이 마음에 근심하는 것을 볼 때에 안타까운 심정에서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한 인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사람이 근심하는 일을 책임지고 해결해 줄 것을 말함으로 나를 믿으라고 했던 것이다. 믿음이란 것은 모든 근심을 하나님께서 해결시켜 주는데 사용하는 선물이다.   

2.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것이다 (2상반절)  

주님은 이 땅의 사람들이 거처하는 것을 볼 때에 불쌍히 여기는 심정에서 이 말을 한 것이다. 이 것은 사실에 있어서 조금도 숨김없이 인간에게 알려주는 심정에서 쓴 말이다. 우리는 천국을 누가 가서 보았다는 것보다도 주님께서 참된 심정으로 말씀한 것이 더 확실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거짓이 있되 주님은 거짓이 없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3. 있을 곳을 예비하는 것 (2하반절)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영원히 있을 처소를 예비하되 그 사람의 일한 데 따라서 예비하는 것이니 심지어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준 것도 상을 잃지 않도록 하겠다는 공평한 심정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를 들면 참된 사랑을 가진 부모가 자식에게 좀 더 많은 생산을 내서 기업으로 주고 싶은 심정과 같은 것이다. 주님은 승천하셔서 다시 오실 때까지 쉬지 않고 역사하는 것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많은 상급을 주고 싶은 심정에서 역사하는 것뿐이다.   

결 론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신부 자격을 가진 자들을 영접하는 심정으로 오시는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충성을 다하는 종들을 위하여 완전한 도성인 새 예루살렘을 예비하고 그리로 영접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다(계21:1~2).

 

인생의 근심할 일과 믿을 일

- 요 14:1~3 -

 

  신앙이라는 것은 근심할 일이 있는 동시에 믿어야 될 일을 믿는 것을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다. 인생에게 근심할 일이 없다면 믿음이라는 것도 하등에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제 근심할 일과 믿을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근심이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일을 가르쳤다.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듣고 예수는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메시아 왕국이 지상에서 이루어질 것을 제자들은 믿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승상을 다투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왕권이라는 것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받는다는 것도 모르는 자들이 누가 크냐 하는 것을 서로 다툴 때에 주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앞에 놓고 어린아이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했던 것이다. 이제 인생이 근심할 일은 무엇이냐는 것을 말한다.

  ① 자기의 기대가 어그러질 적에

  ② 자기가 감당 못할 어려운 시험이 올 때

  ③ 자기가 아무리 애써도 할 수 없게 될 때에 근심하게 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근심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요 근심하는 자를 위로하는 신이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했던 것이다.

  이제 근심하는 사람으로서 믿어야 될 일에 대하여 말한다.

 

  1. 아버지 집에 있을 곳이 많다는 것을 믿어야 된다. (1~2상 반절)

  이 세상은 근심할 수밖에 없는 일이 닥쳐오는 일은 하나님께 서 사람을 세상에 낼 때에 싸워서 이기라고 세상에 낸 것이니 간교한 옛 뱀 마귀와 사단의 세력과 싸워서 이겨야만 왕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밖에 아버지의 집에 있을 곳이 많다는 것을 믿는 신앙에서 세상에 끌리지 말고 세상을 분토 같이 보는 신앙이 있어야만 이 땅에 닥쳐오는 근심된 일을 이길 수가 있다.

  하나님은 인생에게 근심된 일이 있게 한 것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망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고 근심된 일이 올 때에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굳게 믿는 자라면 그 근심이 변하여 즐거움이 되게 하신다(요16:20).

  믿음이라는 것은 이 땅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집에 있을 곳을 믿는 동시에 그곳에 목적을 둔 것이니 누구든지 그곳에 목적을 두고 싸울 때에 하나님은 그 목적을 이루도록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또는 대신 싸워주는 역사를 하신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집에 있을 곳이 많다는 것을 믿고 용기 있게 나가는 자는 하나님의 무소불능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

 

  2. 있을 곳을 예비하는 주님을 믿어야 된다. (2하반절)

  신앙이라는 것은 날마다 날마다 싸우는 생활이 있는 것은 있을 곳을 예비하는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니 주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사명을 맡기고 여러 가지의 십자가를 주시는 것은 있을 곳을 예비하는 일을 하기 위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있을 곳을 예비하는 하늘의 역사는 주와 같이 고난을 당한 자라야 주와 같이 영광을 받기 위한 예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사랑하는 종은 다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시면서 초인간적인 역사로 그를 도와주고 그를 도와야 승리하도록 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시는 주님께서는 언제나 하늘의 역사와 땅의 역사가 아울러 병합되도록 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목적이 이 땅에 있지 않고 있을 곳을 예비하는 그 일에 있기 때문에 있을 곳을 예비하는 예수를 믿는 자는 이 땅에서 받는 괴로움을 영광으로 아는 영계의 지식을 가 져야 될 것이다.

 

  3. 나를 영접하려 다시 오시는 예수를 믿어야 된다. (3)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자녀의 권세를 얻을 것이요(요1:11~12), 있을 곳을 예비하고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왕권을 받게 된다(계20:4). 그러므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려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에 밤낮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참고 나가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어떤 신자가 죽어 천당만을 생각하고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식어졌다면 그 사람은 성령의 역사가 떠난 자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신 목적은 다시 오시는 예수님 앞에 영접을 받을 수 있는 인격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기 때문이다.

  성신은 오셔서 역사할 때에 마귀 시험을 받도록 인도하는 일도 있다(마4:1). 완전이라는 것은 완전 속죄가 있는 동시에 완전 구원이 있고 완전 구원이 있는 동시에 완전한 왕권이 있는 것이니 다시 오시는 주님은 구원을 목적한 것이 아니고 구원받은 자들이 일한데 따라서 왕권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용사적인 걸음을 걸을 때 자기 구원을 목적하지 않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돌진의 걸음을 걷는 것은 주님의 사랑하는 백성을 살리기 위한 사랑 용사의 걸음을 걸어 나가던 자가 순교를 했고 주님 올 때까지 남은 종이 되어서 주님을 영접할 자도 환란과 재앙 속에서 남을 살리기 위하여 용사적으로 싸우던 자가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3가지로 볼 수 있다.

  ① 자기가 죄에서 해방 받기 위하여 믿고 회개하는 신앙이요

  ② 성신을 받기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하 는 신앙이요

  ③ 성신을 받은 자로 남을 살리기 위하여 싸우는 용사적인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 단계는 중생 받는 단계에 신앙도 있고, 장성 단계에 신앙도 있고, 승리의 열매를 맺는 단계에 신앙도 있다. 이제 근심된 일과 믿어야 될 일을 통하여 인간의 걸어가는 길은 완전이라는 세계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위력  

- 요 14:6~13 -  

 

서 론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자체로 오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명을 통하여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게 하려 는 목적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어떠한 것이냐에 대하여 본 성경을 들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1.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아버지 앞에 갈 자가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6~7)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체는 첫째 길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생의 앞길을 생명 길로 인도할 자는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첫째아담으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사망의 길이 생겼고, 둘째아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영생 길을 찾게 된 것이니 이것은 그리스도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라는 것은 죄값으로 죽은 인생을 다시 살려주는 일, 사람을 망케 하던 마귀를 없이 하는 일, 저주받았던 이 땅을 다시 새롭게 하는 일, 이것이 큰 뜻이 되는 것이니 이 것은 그리스도 한 분으로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이라는 것은 육체적인 생명보다도 죽을 몸이 죽지 않도록 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죽어도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2.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일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9~11상반절)  

만일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든지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든지 하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일체인 동시에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을 아드님이 그대로 행하고 아드님이 하는 일을 아버지가 그대로 받아 응답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진 일이다(요15:10).  

3. 예수의 행하신 일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11하반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실천한 일이 조금이라도 불완전이 있다면 그를 믿을 수는 없다고 본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행한 일을 만족히 아심으로 아드님으로 무엇이든지 예수의 이름이면 다 구하는 대로 시행하시는 것이다(13). 만일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행하신 일을 다 믿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적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존경한다 하면서 그 사람의 행한 일을 반대한다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거짓이 될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인생에게 요구하는 바는 이와 같은 신앙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신앙을 통하여서 만이 하나님은 역사하시는 것이다. 이날까지 이 신앙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이 사실인 동시에 앞으로도 더 큰 일을 행할 것이니 원수를 무찌르고 나가는 강한 권세의 역사도 이 신앙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께 받는 것이니 다시 둘도 없는 하 나밖에 없는 것이다.  

 

기도 응답과 영광

- 요 14:10~14 -

 

  하나님께서는 피조물 된 인생에게 기도 응답을 주시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일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독립적으로 완전하게 살 수 있는 인격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야 할 질그릇에 불과한 인격으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것이 인생에게 오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격으로 창조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하와가 얼마나 어리석고 믿음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독생자의 이름으로 응답을 받음으로서만이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아담 하와도 피의 제사를 드리도록 한 것은 독생자의 피로만 응답을 받도록 하신 것이다. 구약시대에 양의 피가 없이는 제사를 드릴 수가 없게 된 것은 아들의 피로만 구원받을 것을 예약하신 것이다.

  이제 기도 응답과 영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1. 아들 예수를 믿어야만 응답이다 (10~11)

  아무리 기도를 한다 하여도 아들을 믿는 믿음이 없다면 응답을 받을 자격이 인간에게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세운 것은 타락한 인간의 행위로는 하나님과 상대가 될 수 없고 독생자의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각각 자기의 인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은 영광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천상 천하에 독생자와 같은 인격이 없기 때문에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아들과 같이 인정을 해주고 아들과 같이 영광을 누리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영광이 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는 것은 독생자도 하나님 아버지도 다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한 방법이다.

 

  2. 믿는 자를 들어서 역사하므로 (12)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믿는 자를 들어서 영광을 받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이 예수를 믿으므로 중생을 받고 완전한 사람이 되어서 역사하는 것을 하나님은 영광으로 받으시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의 수고한 열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부모가 아들을 낳아서 그 아들에게서 훌륭한 자손이 번창한다면 이것이 영광이 되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들어 역사하는 것보다도 아들을 믿는 자를 아들과 같이 성신을 주어 역사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독생자의 대언 기도를 통하여 아들의 소원을 이루어 줌으로만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신의 역사로만이 천국을 이루자는 것인데 먼저는 아들을 들어서 만민을 위하여 죽게 하고 부활케 하고 대언 기도하게 하고 아드님을 통하여 성령이 역사하게 하고 성령이 역사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믿는 자들로 말미암아 완전한 왕국을 이루어 놓는 것은 하나님의 행하시는 새 일의 역사로 지상왕국을 이루는 것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역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오히려 노여워하는 일이 된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신의 역사를 대적하는 자와 같이 취급하기 때문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업을 할 때에 사업의 위원회를 조직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어떤 직공이 그 위원회를 반대하고 자기는 따로 독립을 한다고 하면 그 위원회는 그 사람을 대적으로 알 것이다.

  이와 같이 성부 성자 성신께서 예지와 예정 아래서 대자연을 창조하고 사람을 내어서 어떠한 방법으로 사람을 들어 쓴다는 예정이 있는데 그 뜻을 믿지 않고 인본주의적인 사상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인격이 있고 학식이 있다 하여도 들어 쓸 수가 없고 성부 성자 성신께서 예정하신 섭리를 믿는 자를 들어 쓰되 당신의 완전한 지혜와 능력과 권세를 주어서 당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영광으로 받으신다.

  무소불능하신 신이시지만 당신이 직접으로 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당신이 하지 않고 사람이 홀로 하는 것도 영광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당신의 뜻을 믿는 자에게 당신의 모든 보화로운 지혜와 지식과 능력과 재능을 주어서 그 사람으로 승리하도록 하는 것을 영광으로 받으신다.

 

  3. 아들이 시행하시므로 (13~14)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이 행하신 것은 전부가 영광으로 받으신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소원을 아들을 통하여 이루되 아버지의 사랑과 공의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이 아무리 무엇을 한다 하여도 그 일이 아버지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고, 아무리 만물이 열매를 맺는다 하여도 아버지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고, 오직 독생자가 인간의 죄를 걸머지고 죽었다는 일과, 또는 부활해서 지금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일과, 구름 타고 다시 와서 인간의 범죄로 더러워진 땅을 다시 성도의 나라를 이루기 위하여 성도들을 죽은 자는 부활시키고, 살아남은 자는 변화 승천시키어 완전한 나라를 이루게 되는 일은 전부가 아들이 행하는 일이니, 이것으로만이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영광이 된다.

  우리는 아들이 시행하는 일에 대하여 믿고 기도할 것뿐이요, 그밖에 모든 행사는 주의 역사로 되는 것이니 이것이 조물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다.

 

  결 론

  가장 위대한 일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본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주먹이 천금이라는 시대도 있었고 황금만능이라는 시대도 왔지만 기도 응답이라는 역사로 이루어지는 새로운 시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은 자기 인간 지혜와 지식에 미혹된 자라고 보게 된다. 우리는 기도 응답으로만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우리도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을 믿는 것이다.

 

기도 응답의 삼대 의의

- 요 14:14~17 -

 

  하나님께서는 기도대로 이루어 주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영광이 될 보화로운 것이 충만히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홀로 가지고 있기를 원치 아니하시는 사랑의 신이시며, 그것을 인간에게 주시되 가장 겸손한 사람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겸손한 신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구하는 대로 응답을 나리는 것은 법을 떠나서가 아니고 법을 따라 주시되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여야만 주는 의의 (14)

  하나님께서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여야만 주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예수의 십자가로 죽은 영들을 살렸기 때문에 중생 받은 영들에게 주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만 주게 되는 것이다.

  둘째 :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의로운 자에게만 주시기 때문에 예수의 의밖에는 하나님의 것을 받을 조건이 없는 것이다.

  셋째 : 하늘과 땅의 권세를 예수에게 맡겼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만 응답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공의가 없이 함부로 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자에게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이기 때문에 범죄한 인간들에게 은혜를 나리는 것은 그리스도 순종의 의로운 행동을 따라 주시는 것이다.

 

  2. 예수를 사랑하는 자에게 주는 의의 (15)

  누구든지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있게 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생활이 있을 때에 무엇을 구하든지 모든 것을 받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형제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일을 행하는 자라면 예수님께서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도록 응답을 내리시게 된다. 왜냐하면 응답을 내리시는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를 대행자로 쓰시기 때문이다.

 

  3. 주께서 아버지께 구하는 의의 (16~17)

  주님께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더 큰 역사를 주시기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통하여 더 큰 역사를 하시기 위한 목적이다. 누구든지 형제를 살려 보려고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행하는 자라면 주님께서 그에게 더 큰 은혜를 받게 하시기 위하여 간구하시는 일이 있다. 이것은 형제를 살리려는 마음이 있는 자를 더 크게 쓰시기 위한 목적에서 하시는 기도이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구할지도 모르는 인간이지 만 더 큰 역사를 주시기 위하여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나의 받은 체험에 의하면 남을 살리기 위하여 전심전력을 다 기울일 때에 언제나 구한 것 외에 더 큰 은혜가 오는 것을 받았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받고 있는 나 자신도 의심할 정도였던 것이다. 누구든지 더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은 자신이 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간구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무조건 주시는 것이라고 본다. 은혜 위에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신 열매이다.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일에도 세 가지 의의가 있다.

  첫째 : 죄를 철저히 자복하는 자에게 죄를 사해 주는 기도가 있다.

  둘째 : 남을 살리고자 하는 자에게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대언 기도가 있다.

  셋째 : 택한 자가 죄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게 될 때에 그를 위하여 간구하는 기도가 있다.

  우리는 항상 형제를 살리고자 하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게 될 때에 기도의 응답은 계속으로 내리되 더 큰 은혜를 받게 되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완전하신 사랑은 택한 자에게 완전한 것을 주시되 진리를 따라 주시는 것이다. 아무리 기도하여도 진리에 탈선된 자의 기도는 받을 수 없고, 참으로 희생적인 사랑에서 남을 살리고자 하는 자의 기도는 무조건 주님께서 응답으로 내리신다. 주님께서는 택한 자에게 여러 가지 일을 살펴보시고 진실한 것을 따라 응답을 나리는 데 있어서는 완전한 열매를 맺도록 하시는 것이다.

 

참된 평안

- 요 14:23~31 -

 

서 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는 자에게 참된 평안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 중심의 사랑인 것이다. 하나님 자체가 평안의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에게 참된 평안을 주기 위한 활동은 초자연적인 신의 역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마귀역사가 불안과 공포라면 하나님의 역사는 참된 평안과 기쁨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낸 것은 당신에게 있는 평강을 같이 누리자는 것이 창조주의 목적이다.

사람이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도 평안히 살 수 있게 한 것이 에덴동산의 축복이요,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히 죽지 않을 생명과를 먹게 하자는 것이 인생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 인류는 참된 평안을 요구하는 것이 동일한 소망 일 것이다. 그리나 어리석은 인간들은 이 평안을 어디 가서 찾느냐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므로 평안을 구하다가 죄를 짓고 마는 것이다.   

이제 참된 평안은 어디서 어떻게 오느냐 하는 것을 주님의 교훈을 통하여 우리는 받게 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데서이다 (23)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예수같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에게 와서 동거동락 함에 평안이 있는 것이다. 이 평안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2.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25~26)  

사람의 심령이란 것은 모든 것을 알게 되는 데서만이 발전을 가지고 오는 것이니 성령이 우리에게 옴으로 우리들도 앞으로 될 모든 일을 가르쳐서 알게 함으로써 평안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성령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사람의 교훈을 존중히 한다면 자동적으로 그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겸손히 자기의 지식을 포기하고 성령님의 가르친 것을 중요시할 때 아무리 어려운 문제가 온다 하더라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식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사람의 심령이라는 것은 참된 도리를 바로 깨달아 아는 지각이 있음으로써만 이 참된 평안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주님께서 하늘나라에 갔다가 다시 오시는 일이 있으므로 참 평안이 있다 (28)  

만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시체가 무덤에서 다시 살아서 승천하여 가신 일이 없다면 그를 믿는 신앙에서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 신앙의 확실한 소망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수님이 부활해서 하늘나라에 승천하신 것이 확실하고 또는 우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예비하는 일을 하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는 스데반도 낯빛이 천사같이 되었던 것이다.  

바울은 로마 옥중에서도 “항상 기뻐하라”는 말을 한 것은 위에서 역사하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가셨다 오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자로서 영원한 평안을 소유할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4. 세상 임금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다 (30~31)  

만일 기독교의 신앙이 어떤 세상 정치에 국한된 것이라면 참된 평안을 보전할 수 없다. 이 평안은 세상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의 지배를 받는 평안이라는 것이니 세상 임금이라는 것은 그 자체에 평안을 줄 만한 인격이 없는 임금이 되기 때문이다. 세계 평화의 완전한 평안의 안식 시대를 이루는 임금은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이다.   

결 론  

우리에게 평안을 주려고 괴로움과 죽음을 맛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한 분 만으로 인류적인 참된 평안은 필연코 영원한 것으로 온다는 것이 기독교 종말의 안식의 시대라 하는 것이다.  지금은 개인적인 중심 평안을 주는 것은 안식의 시대에 왕권을 소유할 인격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다. 만일 중심적 평안이 없다면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를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중심적 평안을 소유 한 자가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 가는 동시에 안식 세계의 세세 왕권을 누리는 것을 기독교의 신앙의 길이라 하는 것이다.  

 

예언과 신앙 문제

- 요 14:25~31 -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인생들에게 믿어서 구원을 받고, 믿어서 완전 승리를 이루게 하시기 위하여 역사하실 때에 언제나 미리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시면서 믿으라고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너무나 작고 좁은 두뇌를 가졌고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예언대로 행하시는 일을 믿으라고 할 때에 그 증거를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하는 것이 의로운 심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한번 죄를 범했다고 하여서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지도 않고 인생을 버린다는 것은 의로운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예언대로 행하시면서 믿어 복을 받게 하신 일은 다음과 같다.

  첫째 : 아브라함에게 말씀대로 행하시면서 믿게 하심 (창21:1 ~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은 성경 전체의 제목과 같이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즉시에 씨를 주지 않고 나이 100세가 될 때에야 말씀대로 노쇠한 사라의 몸에서 이삭을 낳게 하시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길러 이삭을 바치기까지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고 그 믿음 위에 축복하신 것이다.

  둘째 : 모세에게 말씀대로 행하시면서 믿게 하심 (출3:6~8)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상수리나무 아래서 가나안 땅을 네게 준다고 말씀하셨고, 네 씨가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이 찰 때에 여호와 그들을 그 압박 속에서 구원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대로 이방의 객이 되어 400년이 찰 때에 모세에게 나타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네 조상에게 말한 대로 가나안 땅으로 네 민족을 인도하겠다고 하시었다.

  그 예언이 응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큰 기사를 행하도록 하시어 이스라엘로 하나님은 말씀대로 행하시는 참되신 신이시라는 것을 믿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을 줄 적에 율법과 계명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세상에 나타날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말씀대로 행하는 증거를 믿게 하시면서 그들에게 모세 오경을 주셨다.

  셋째 : 다니엘에게 말씀대로 행하시면서 믿게 하심 (단9:8~ 11)

  다니엘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담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모세 율법과 선지의 예언을 순종치 않은 죄로 예언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이 망해서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로 된 생활에서 조금도 몸을 더럽히지 않고 성별된 생활을 하므로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을 들어 쓸 때는 예언한 말씀이 응하는 증거를 믿게 하시고 그 믿음에 의하여 역사하셨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니엘도 다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에 믿음의 담대함을 얻어 역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부활을 앞에 놓고 미리 말씀하신 것은 그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담대히 믿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예언과 신앙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말씀이 생각나도록 해서 믿게 하심 (25~26)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믿게 하시는 동시에 모든 말씀이 다 생각이 나게 하시는 것이다. 사도들이 주님을 따라가면서 그 교훈을 받은 것을 그 때는 다 알지를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예언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예언대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신을 보내어 역사하시므로 주님의 말씀이 전부 생각이 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큰 힘을 얻는 동시에 주님의 교훈을 증거할 때에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을 친히 체험을 한 신앙에서 담대히 증거하게 된 것이다. 만일 기독교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일이 분명하게 없다면 그 믿음도 완전한 믿음에 들어 갈 수 없다.

 

  2. 참 평안을 주어서 믿게 하심 (27)

  우리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언대로 역사해 주심을 받게 될 때에 평안함이 따르게 된다. 하나님의 예언이라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고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시겠다는 것이니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을 믿는 자에게 참 평안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참 평안을 얻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믿지 않고 의심할 때에 예언대로 이루어지는 체험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예언대로 이루어진 십자가 부활을 참으로 믿는 자라면 참 평안을 마음에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3. 원수의 피해를 받지 않고 이기게 하심 (28~31)

  예언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마귀의 세력을 완전히 이기게 하는 역사이니 아무리 세상에 악의 세력이 강하다 하여도 그것이 하등에 관계가 없다 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마귀를 이기게 해 주시는 것을 믿는 것이니 앞으로도 완전히 승리할 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따라가는 생활이다. 성경대로 행하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성경대로 행하실 것을 믿고 따라가는 자에게 완전한 새 시대의 영광을 누리는 왕권을 받게 하시는 것이다.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라면 이루어질 것을 믿는 신앙은 용기 있게 싸워 나가야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이루어진 역사가 우리 심령을 살리는 복음이 되었고 예언대로 행하실 역사가 우리 몸까지 구원하는 종말의 역사가 된다.

 

  결 론

  기독교는 완전한 언약의 말씀을 믿는 것이니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의심 없이 믿으므로 인격적인 체험을 받게 되고 이루어질 것을 믿고 마귀 미혹과 싸워 나가는 자에게 이루어질 심판에서 남은 자가 되어 지상왕국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

- 요 15:1~8 -

 

  우리 인생은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을 하게 되는 것이 최고의 인격이며, 가치 있는 생활이라고 본다. 아버지께서는 홀로 영광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아들을 통하여서만 받으시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풍부한 것이 있다 하여도 아버지 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영광이 될 수 없다. 세상에서 어떤 아버지가 훌륭한 보화를 품에 안고서 아들에게 주기가 아까워 만지고 있다가 끝을 맺고 만다면 아무런 영광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화를 아들에게 주어서 사회에 유익이 되는 일을 하도록 했다면 이것은 아버지께 큰 영광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아버지는 농부요, 자기는 포도나무 그루터기요, 사명을 맡은 종은 가지라고 하셨고, 어떻게 되므로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충만하게 열매를 맺게 하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런데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일에 있어서는 오직 독생자 예수로 말미암아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열매가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도 없고 영광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광을 받기 위한 목적에서 역사하는 그 일은 다음과 같다.

 

  1. 열매를 맺게 하려고 깨끗케 하시는 역사 (1~3)

  인간이라는 것은 질적으로 타락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처음 열매로 가인이라는 악한 살인자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둘째 열매로 의로운 아벨을 낳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악의 열매가 의로운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담의 가정에 있었던 비극이다. 그 때부터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자는 언제나 악한 열매를 맺는 사람에게 피해를 당하는 세상이 되었다.

  언제나 악의 세력이 의의 열매를 없이 하려고 하는 인류 역사가 아담의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그대로 두고는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을 세상에서 할 수 없게 된 것이 말세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세에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것은 더러운 인간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법을 세우기 위한 희생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거룩한 신이라고 해서 더러운 인간들을 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더러운 인간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끗케 만드는 법을 세운 것이 속죄제를 받으시고 응답을 내리는 역사가 된다. 누구든지 깨끗해지기를 원하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무조건 깨끗케 만들어서 열매를 맺게 하시되 가장 깨끗한 진액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도록 하는 것을 기독교의 은혜 역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스스로 깨끗하게 살 수 있도록 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끗해진 자라야 마귀를 이길 수 있으며, 자기가 스스로 깨끗해지려고 결심했다는 것은 외식에 불과한 행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인간 자체에는 타락한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깨끗해지는 것이 사람에게 있지 않고 조물주 하나님의 역사로 깨끗해지는 열매가 있는 것을 생명의 종교라는 것이다. 아무리 교회가 모든 일을 잘해 나간다 하여도 깨끗케 하는 역사를 받지 못했다면 아무런 열매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받는 일에 목적을 둔 것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이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만 열매를 맺게 하시는 역사 (4~6)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법을 세운 것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삼으신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천국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소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인격으로 창조했다고 볼 수 있다.

  아담이 너무나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아담과 같이 미약한 존재라면 기독교를 유지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오직 속죄제를 드림으로만 구원을 받은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다. 구약 때에 양을 잡아 드렸던 제사는 오실 메시아를 믿고 드린 것이며,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제사는 오신 메시아의 영원한 속죄제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하시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그리스도의 의의 역사가 아니고는 아무런 것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 그리스도의 의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야만 있다는 것이다.

  셋째 : 인간의 어떤 행위로는 성신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신의 역사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운 역사로만 우리에게 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성신을 아버지께 받으시고, 거룩한 피로써 우리를 사서 당신의 지체로 삼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우리에게 그리스도께 있는 성신의 역사가 오는 것은 자동적으로 되는 일이다. 예를 든다면 포도나무 그루터기에 있는 진액이 가지로 오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요, 자동적으로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의 역사가 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매를 맺는 것은 독생자의 역사이므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행함으로써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마음 자체가 악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독생자 그리스도의 대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역사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의라고 본다.

 

  3. 열매를 맺게 하려고 응답하시는 역사 (7~8)

  오늘에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이냐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에 있어서 사람이 해야 할 의무이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말씀이 있다 하여도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줄 수가 없는 것이요, 구한다 하여도 그 말씀이 마음에 없는 자라면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구하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는 것이 기독교의 역사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먼저 역사를 하시고자 하여 언약을 세우신 말씀을 의심 없이 믿고 구할 때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기도 응답이라고 한다.

  오늘의 기독교가 말씀을 혼선시키는 일이 있다면 가증한 예배가 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노엽게 하는 기도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혼선시키는 예배와 기도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가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말에 하나님이 순종해 달라는 것과 같다. 이러한 사람의 행동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겠다는 마음보다도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자기에게 속해 있는 한 부분으로 여기는 일이 된다. 자기의 할 일을 다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든지 자기 할 것을 다하고 그 남은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일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시고 , 내가 나를 위하여 일하는 것보다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이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 라는 것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할 때에 응답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일이 되는 것이다.

 

  결 론

  열매가 있으므로 아버지께 영광이요, 열매가 없으므로 아버지께 슬픔이 된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많은 열매를 맺어서 복을 받으라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이다.

 

열매를 바라는 포도원 농부의 심정  

- 요 15:1~5 -  

 

서 론  

하나님께서는 택한 이스라엘이 축복 받는 열매가 있기를 바라는 심정을 포도원 농부의 뜻으로 말씀 하셨다. 열매를 바라는 농부는 얼마나 노력이 심하다는 것은 성경 을 보아서 알 수 있다.  

1. 심을 때의 노력 (사5:2)  

농부가 포도를 심을 때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땅을 깊이 파고 돌을 제해 버리고 포도나무가 뿌리를 깊이 박도록 노력함 같이 하나님께서는 참된 이스라엘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인간 죄악을 대속하는 십자가의 희생이 근본이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희생의 피를 흘려서 교회를 세운 것은 열매를 요구하는 농부의 심정과 같다.   

2. 가꿀 때의 노력 (사5:6)  

포도원 농부가 포도원을 재배할 때 북을 돋우고 물을 대고 비료를 주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고 참된 종들을 품꾼으로 사용하여 그들로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기까지 노력케 하신 것은 열매를 구하는 농부의 심정과 같다.  

3. 열매를 맺을 때의 노력 (요15:1~2)  

농부가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발견될 때 이것을 제해 버리고 열매가 많이 달린 가지는 더 많이 맺도록 배양함 같이 하나님께서도 말세에 제할 자를 제하고, 가꿀 자는 가꾸는 것은 열매를 얻기 위한 농부와 같다.  

결 론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은 인간에게 말씀하신 말씀을 좇을 뿐 듣고 따라가는 자는 열매를 맺게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요15:7, 고전3:5~6).  

 

예수의 친구 된 자격  

- 요 15:7~20 -  

 

서 론  

우리 인생의 최고의 기쁨과 아름다운 생활은 친구로 말미암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부모보다도 처자보다도 친구의 관계라는 것은 큰 산이라도 무너뜨릴 만한 새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친구가 좋고 나쁘고 귀하고 천한 관계에서 인격은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친구 된 자격이라는 것은 얼마나 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만왕의 왕 예수의 친구 될 자격은 다음과 같이 본문은 가르치고 있다.  

1. 예수의 말씀이 마음 안에 역사 하는 사람이다 (7~8)  

만일 친구를 사귄다 하더라도 물질이나 어떤 오락적으로 사귄 친구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로되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사귄 친구는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있으므로 좋은 열매를 가져올 것이다.   

그렇다면 만왕의 왕 예수의 진리의 말씀이 내 마음에 믿어지고 그 말씀이 내 마음에서 역사할 수 있는 생활이라면 예수와 같은 동등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씀은 생명이니 말씀을 통해서 포도나무 그루터기 되시는 예수님께로 생명의 능력의 힘이 내게 와서 역사함으로써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2. 주님의 사랑에 거하는 자이다 (9)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우리가 그 계명을 지킴으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계명을 명하시고 인간이 홀로 행하라는 주님이 아니시다.  법적인 계명은 사람이 행하라는 몽학선생에 불과한 계명이다.

주님의 계명은 우리를 향하여 성령의 역사로 사랑의 은사를 주어서 남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불타도록 만들어서 그 계명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니 사람을 죽이던 바울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고 사람이 무서워서 떨던 베드로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다. 이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 계명을 지키는 자는 내 친구라고 한 것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싸우는 자에게 해당된다.  

3. 사명적으로 택함을 받은 자이다 (16)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반면에 사람을 택할 때 어떻게 쓰겠다는 예정 밑에서 택하여 쓰는 것이니 택함을 받은 자는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는 것이 주님의 말씀 이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를 택했다는 것이다. 주님은 무엇이든지 홀로 하시기를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택해서 당신의 할 일을 대신해서 그 사람으로서 친구적인 영원한 왕권에 동참자로서 영광을 누리기를 기뻐하시는 것이 주님의 완전한 사랑의 심정인 것이다.

이것은 당신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선지 이사야를 통하여 갈릴리 해변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말씀이 응하기 위해서는 그 해변에서 어부의 생활을 하는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을 택하여 세워서 그들로 시작된 교회가 창대하여 세계를 정복하게 한다는 예언의 말씀이 응하기 위한 뜻에서 그 제자를 택하였던 것이다.  

4.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게 되는 것이다 (19~20)  

우리가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증거는 예수를 핍박하던 세상이 우리를 핍박하는 것은 예수의 친구가 된 표적이다. 만일 어떤 종이 세상 사람에게 대환영을 받는 종이라면 그 종은 세상에 속한 자라고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밀접한 친구의 생활이 될 때 자동적으로 세상에서는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택함을 받은 증거이니 우리는 필연코 열매를 맺는 자리에 이르게 될 것을 굳게 믿고 나가야 될 것이다. 만일 주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완전케 해줄 것을 믿지 않는다면 자동적으로 주님의 친구가 아닌 생활이라고 보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 제일 기뻐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이 틀림없이 내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담대히 증거하는 자이다. 이 일에 목숨을 바친 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다 예수의 친구일 것이다.  

 

주 안에서 나타나는 열매

- 요 15:7~11 -

 

  인생의 완전한 열매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완전한 것을 사람에게 주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사랑의 법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열매 없는 타락의 생활을 하였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되어 이상적인 영원한 나라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열매에 대하여 본문으로 증거한다.

 

  1.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일 (7)

  아무리 인간들이 애써도 그리스도 안을 떠나서는 아무런 것도 이루어지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만 무엇이든지 원하는 데로 이루어지는 일이 있게 되는데 있어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양심적으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 : 생활적으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셋째 : 사업적으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것은 양심, 생활, 사업으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에 다음과 같은 열매가 있다.

  ㄱ. 양심적으로 만족한 성결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일이 있게 되므로 중심 성결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ㄴ. 자유로운 생활이 있게 되므로 헛된 수고가 없이 그 날 그 날에 족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ㄷ. 그리스도의 일을 하게 되므로 초인간적인 힘이 와서 여호와를 자랑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주의 제자 된 인격이 이루어지는 일 (8)

  우리 인생의 최고의 인격은 만왕의 왕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인격이다. 제자라는 것은 스승에게 있는 것을 다 배워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있는 것을 옮겨 가진다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인격이다. 그리스도께서 가장 가난하고 무식하고 무능한 어부를 제자로 택할 때에 바리새인들은 죄인의 친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일이니, 아무리 더러운 죄인이라도 거룩하게 되고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지혜롭게 되고 아무리 약한 사람이라도 능력 있게 된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정치나 교육이나 수양으로는 도저히 그 인격을 이룰 수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인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 할 때에 완전한 인격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완전한 인격을 이루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은 독생자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목적이다.

  가장 어리석고 헛된 일은 인간들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지 않고 행하는 일이다. 인간들이 스스로 하는 일은 사람이 볼 때에는 훌륭한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멸망의 자식들이 하는 일로 보신다. 인간들이 스스로 하는 일은 아무리 수고하여도 완전한 인격을 이룰 수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의 제자 된 인격을 이룰 수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만 들어가는 자라면 자기도 모르리만큼 인격이 향상 되는 것이다.

 

  3. 기쁨이 충만하게 사는 일 (9~11)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도 기쁨으로 살아 보려는 데서 되는 일이요, 밤낮으로 글을 읽기를 좋아하면서 서책 생활을 하는 사람도 기쁨으로 살려는 데서 되는 일이다. 사람이 기쁨으로 살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는 스스로 비관해서 자기 목숨을 끊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 도 안에서 사는 기쁨의 생활은 다음과 같다.

  첫째 : 물질계를 초월한 기쁨

  둘째 : 인간 도덕을 초월한 기쁨

  셋째 : 인간의 오락을 초월한 기쁨

  이 기쁨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니, 그 기쁨을 체험한 자는 인간 물질계에서 되는 일을 오히려 분토같이 보게 된다. 왜냐하면 물질을 위하여 사는 것보다도 물질을 바로 사용하기 위하여 사는 생활에서 그 물질을 따라 오는 안락을 불행스럽게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인간 도덕적인 방면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 중심에서 생활하게 되므로 도덕에 국한된 생활을 흑암으로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을 위한 생활은 외식이 되기 때문이다. 도덕을 초월한 생활의 기쁨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고 독수리가 공중을 향하여 날듯이 향상의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땅 위에 살고 있지만 천국의 것으로 살 수 있는 생활이라면 그리스도 안의 기쁨이 충만한 생활이라고 본다.

 

  결 론

  그리스도 안의 열매라는 것은 땅에서 오는 것을 받는 열매가 아니요, 하늘에서 오는 것을 받는 열매이다. 그러므로 이 열매로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고, 인간에게 큰 축복을 가져오는 일이 될 것이다.

 

 

말씀 충만과 기도의 열매

- 요 15:7~10 -

 

  인생의 최고의 인격은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한 것이라고 보게 된다. 사람이라는 것은 말씀이 없는 인격은 다 허공을 치는 바람잡이 생활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수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이니 말씀을 통하여 아무리 부족한 인간이라도 하나님은 역사하기 때문이다.

  이제 말씀이 충만한 자에게 기도의 열매가 따라가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말씀이 충만해 지는 일 (7상반절)

  사람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품안을 떠나서는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말씀대로 메시아를 보내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성경을 많이 읽었지만 그리스도를 대적할 때에 오히려 멸망을 자취하는 불행을 가져 왔던 것이다(요5:39~42).

  성경은 전체가 그리스도의 역사를 가르친 것인데 그리스도 안에 들어 온 자 외에는 그 말씀을 알 수도 없고 말씀이 하등 그 사람과의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역사하시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야 말씀이 충만해 지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가 마음에 충만해지므로 그리스도의 가지 된 자격을 가지고 역사 할 수 있다.

 

  2. 기도의 열매 (7하반절)

  기도의 열매라는 것은 진리가 충만한 자가 진리대로 구할 때에 진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의 열매이다. 기도라는 것은 진리를 따라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진리대로 구하는 특권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 준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후의 일은 전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기도를 통하여 말씀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그 말씀을 믿고 구하는 자는 하나같이 열매가 나타나는 것을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기도의 열매가 없다면 이 사람은 말씀이 마음에 거하지 않는 자라고 보게 된다. 말씀이 마음에 거한다는 것은 진리대로 행하신 십자가를 믿고 진리대로 역사하는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 진리의 신 성령이 마음에 역사하므로 진리가 마음에 충만해지고 진리대로 역사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뜻은 그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롬8:27~28).

  기도라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 데서 열매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진리가 마음에 충만한 자가 그 법대로 입을 열 때에 진리대로 역사하는 하나님은 언제나 응답을 내리는 것이다.

 

  3. 주님의 제자가 됨 (8)

  제자라는 것은 선생과 같이 된 자를 가르쳤다. 주의 제자가 될 때에는 주님의 대행자가 되는 것이다. 주님이 할 말을 종이 하고 주님이 갈 곳을 종이 가는 것이 제자다. 언제나 주께서는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성하신 후에 진리가 충만한 사람에게 기도의 특권을 주어서 그 기도에 따라 역사하는 것이 주님의 제자가 된 생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매가 많은 자라야 제자가 된다고 말했다.

  금일에 많은 종이 있지만 그 기도가 열매가 없이 될 때에 교회는 참포도 열매가 없고 오히려 부패한 개포도가 되는 바벨적인 사상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말씀이 충만한 자라야 예배가 상달되고 예배가 상달된 자에게라야 열매가 있고 열매가 있는 자라야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지된 종들의 역사라 는 것이다.

 

  결 론

  진리라는 것은 자체가 그리스도요 그 진리의 열매는 가지 된 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니 진리가 충만한 마음에 기도를 바로 할 수 있는 영력이 오고 영력이 있는 기도라야 열매가 있는 것이니 언제나 주의 종 된 자는 그 말씀에 충만한 생활이 있어야만 입에 열매 있는 종이 될 것이다.

 

제일 큰사랑

- 요 15:9~17 -

 

  인간들이 누구든지 마음에 사랑을 요구하되 큰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사람의 양심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호소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일 큰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헤매는 것이 흑암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의 시험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제일 큰 사랑의 비밀을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그 사랑을 오히려 어리석게 아는 마음까지 생기도록 하는 것이 마귀 역사라는 것이다.

  이제 제일 큰 사랑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하나님께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랑이다 (9상반절)

  인간이 볼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 유대 땅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나서 쓸쓸한 빈곤을 거쳐 나사렛 목수 요셉의 가정에서 목수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일이나, 또는 죄인의 친구라는 이름을 달게 받으시고 죄인을 찾아간 일이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령의 고통이 심하여 땀이 피가 되는 일이나,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힐 사형장으로 나갈 때에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쓰러지고 넘어지며 십자가를 지고 나간 그 길에 어떠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사렛 예수에게 임했다는 것을 알 자는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소위 대제사장이라는 무리들이 예수는 하나님이 저주했다고 판단을 내리며 비소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 부활 승천하셔서 만왕의 왕이 된 일은 하나님의 큰 사랑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이라는 것은 일시 평안을 주고 기분을 주는 것보다 잠깐의 고난을 이기고 나가서 세세 영광을 누린다는 것이 큰 사랑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나사렛 촌 중에 목수의 한사람인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이 되고 천하 만민이 그를 믿고 예배하고 섬기게 된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사랑일까

 

  2. 주님의 사랑 (9하반절)

  이 사랑이라는 것은 완전한 사랑이니 완전한 사랑이라는 것은 죽을 자를 완전히 살려 주고 병든 자를 완전히 고쳐 주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자를 인격을 주고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해주는 사랑이다. 세계 인류가 이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새로운 왕국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는 사랑이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지식으로 알 수 없고 어떤 힘으로 그 사랑을 끓을 수가 없고 어떤 과학적인 기술로써 그 사랑의 가치를 다 발휘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성신의 감동을 받은 자만이 알 수 있고 믿을 수도 있고 그 사랑을 마음에 간직 할 수도 있다. 약자가 강자를 위해서 죽는 일이나 불완전한 사람이 완전한 사람을 위해 죽는 일은 인간에게 있을 수 있으나 완전한 사람이 불완전한 사람을 위해 강자가 약자를 위해서 죽는다는 사랑은 그리스도께만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이 사랑을 완성했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에게 완전한 것을 줄 수 있는 신앙의 대상자가 된 것이다. 이 사랑은 체험한 자만이 그 사랑 안에서 완전한 인생의 가치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3. 친구를 위해 죽는 사랑 (13)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 중에 남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까지 싸워 주는 사랑이니 십자가 도를 전하는 종들이 세계 인류의 많은 죽은 영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목숨이 없어지더라도 눈물 흘리면서 십자가를 증거했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 중에 제일 큰 사랑일 것이다. 우리에게 의복을 주고 먹을 것을 준다 해도 이것으로 큰 사랑이 아니고 우리에게 참된 진리 하나를 전하여 주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그 사랑은 무엇으로 갚을 수 없는 사랑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큰 사랑을 받은 자는 자동적으로 그 사랑이 나를 완전케 할 때에 완전한 인격으로 남을 살릴 수 있는 사랑이 순교한 성도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 사랑이 아니면 기독교는 과거나 현재, 미래에 완전승리를 이루는 단체가 될 수 없다. 우리 앞에 승리의 길은 이 사랑을 남에게 주자는 불타는 마음에서 나서는 종들에게 완전한 역사가 말씀으로 임하고 능력으로 임하고 권세로서 임하여서 완전승리를 이루는 세계통일의 평화의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큰 사랑은 하나님께 있고 예수님께 있고 참된 성도에게 있는 것이니 이 사랑으로서만 마귀를 승리하고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 질 것이다.

 

사랑과 기쁨

- 요 15:9~14 -

 

  인생이라는 것은 사랑과 기쁨이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을 창조하실 때에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서 극도로 기쁘게 살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되 극도로 기뻐할 수 있는 생활에 들어가도록 목적을 두고 사랑하는 것이니 인생으로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떠나서는 아무런 열매가 없도록 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자체이신데 그 사랑을 사람에게 주어야 하나님도 기쁘고, 받은 사람도 기쁨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사는 가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만 가치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은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만 하나님은 영광이 되는 것이다. 사랑과 기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사랑 (9~10)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이 아니고는 참 사랑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통적인 사랑이라야 우리 인생에게 열매가 있게 된다. 계통적인 사랑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일

  둘째 : 예수님께서 제자를 사랑하신 일

  셋째 : 제자가 우리를 사랑하는 일

  이것이 계통적인 사랑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 죄를 걸머지고 세상에 나게 하시고 만민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게 하신 것은 극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받게 된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물과 피로 임한 그 몸을 하나님께로 받게 된 것은 큰 축복이라고 본다. 아무리 성자의 신이 있다 하여도 사람의 몸을 하나님께로 받지를 못하였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도 없고 영광을 받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몸이 없이는 영광을 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축복은 영광스러운 몸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일이라고 본다. 그리고 만민의 죄를 담당할 수 있는 인격을 받게 된 일이다. 예수님의 큰 영광은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인격을 가진 일이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몸을 하나님께 받았다 하여도 만민을 위하여 죽은 일이 없다면 세계 통일의 왕권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을 원하셨던 것이다(사53:10).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인간이 볼 때는 괴로운 길 같으나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걸어가신 길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아들을 통하여 영원한 나라를 이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예수님이 제자를 사랑한 일에 대하여 말한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할 수 있는 사명을 맡게 되었다는 것은 가장 큰 사랑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께 사명을 맡겨서 세세 왕권을 받게 하였고, 예수님은 제자에게 사명을 맡겨서 세세왕권을 받게 하려는 사랑이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은 양떼를 위하여 죽게 한 것이 하나님 의 사랑이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고난을 받게 하고 순교를 당하게 하는 것이 큰 사랑인 것이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종을 남보다도 고난을 더 많이 받게 하신 것은 극히 사랑하는 일이라고 본다.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살던 사람이 예수님의 대행자로 일하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같이 받고 그 영광을 같이 받는다는 것은 사랑 중에도 큰 사랑이라고 본다.

  다음은 제자가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다. 형제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진리로 가르치고 책망을 하고 붙들어 주고 위로해 주고 서로 기도로 돕는 일이니 내가 용서를 받았으므로 남도 은혜를 받게 하고자 하는 사랑이 불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사랑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라고 본다. 사도들이 그 사명을 받아 피를 흘려 교회를 세움으로서 우리가 그들이 세운 교회에서 그들이 전한 복음 안에서 말세에 큰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된 것은 무엇으로써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사도가 가르친 교훈 안에 그대로 거하면 사도와 같이 큰 축복을 왕권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순교한 종들의 사랑을 통하여 완전 역사가 변화 성도에게 오는 것은 계통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 기쁨 (11~14)

  기쁨이라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악한 자의 기쁨도 있고 의로운 자의 기쁨도 있으니 악한 자는 남이 망하는 것을 기뻐하고 의로운 자는 형제가 복을 받는 것을 기뻐한다. 예수님께서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해서 이것이 나의 양식이라고 하였던 것이다(요4:34).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완전해지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들은 자기가 고생을 해도 형제가 복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참된 종들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서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기독교의 완전한 승리는 참된 기쁨을 계통적으로 가지는데 있는 것이다. 형제가 형제를 살리기 위하여 기쁨으로 순교를 하는 일인데

  첫째는 예수님이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는 일을 가장 영광으로 생각하시고 기뻐하신 일이다.

  둘째는 모든 사도들이 양떼를 위하여 십자가를 증거하다가 순교하는 것을 기뻐한 일이다.

  셋째는 우리가 그들의 열매로 마지막 싸움을 싸워서 승리하고 재림의 주를 맞이할 때에 모든 선지나 사도나 성도들이나 다 같이 크게 기뻐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계18:20, 19:5~8).

  세세 왕국이라는 것은 계통적인 기쁨을 받은 자들이 한데 모여서 기쁘게 영광을 누리는 세계를 말한다. 오늘날 이 계통적인 기쁨을 받은 자들이 하나같이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재림의 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결 론

  우리가 가장 바라고 기다리는 것은 한 사랑 안에 한 기쁨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왕국을 바라보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통적인 사랑과 기쁨이 있는 자라야 종말의 지상 왕국을 이루는 반열에 들 수가 있다.

 

주님의 선택과 역사

- 요 15:16~20 -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인생 자력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역사이니, 이 역사를 방해할 자는 전혀 없다. 주님께서 택한 종을 시련을 받게 하는 것도 역사하기 위한 방법이요, 핍박을 만나게 하는 것도 역사를 하기 위한 방법이니, 택함 받은 종으로는 아무 것도 염려할 것 없고 두려워 할 것도 없이 순종할 것뿐이다.

  선택이라는 것은 무소불능 하신 하나님께서, 예지와 예정 아래서 택한 것이니 주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 거리에 거룩한 예복을 입고 왕래하였지만, 그 사람들 중에는 택한 자가 없으므로 그들은 오히려 메시아를 반대하는 운동에 전력을 두었던 것이다(요10:26~31). 아무리 인간이 볼 때는 거룩한 자 같고, 진실한 자 같지만 택한 자가 아닌 자들은 중심에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형식을 따르게 된다.

이제 택한 자에 대한 주님의 역사를 본문에서 읽으면서 알아보기로 하자.

 

  1. 택하여 세움 (16상반절)  

  주님께서 택하여 세우는 일은, 택한 자가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니 택함을 입는 자도 뜻밖에 홀연히 이루어지는 일로 되는 것이다. 벳새다 동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자기네가 사도가 되리라는 것은 생각조차 못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역사라는 것은 종 된 사람이 어떤 계획이나 방법을 세운 것이 아니고,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므로 오히려 자기 사명을 모르고 떠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베드로가 부름을 받을 적에 “주여, 나를 떠나소서”하고 떨었던 것이다(눅5:8).

  사람이라는 것은 언제나 주의 일을 할 때에 자기의 어떤 욕망이나 기대를 가진다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고 아무런 소망 없는 자리에서 양심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할 때에 택하신 하나님 편에서 그를 찾아와서 강권으로 깨우쳐 주고 붙들어서 쓰는 것이니, 누구든지 스스로 섰다 하는 사람은 자칭 선지가 될 것이다.

  금일에 와서 아무런 체험이 없이 신학을 나오고 시취를 받고 주님께로부터 특명을 받은 일이 없이 나선 사람에게는 아무런 주의 역사가 없는 것이니, 주의 종이 되는 자는 주님이 채워 주는 체험을 확실히 받은 자가 되어야만 참으로 택한 종이라고 보게 된다. 어떤 종이 자기는 아무런 체험이 없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어떤 큰 체험을 받고 나온다는 것을 오히려 이단시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자동적으로 외식하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2. 기도의 응답이 있음 (16하반절)

  택한 종의 기도라는 것은 주님께서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이, 강권으로 시키는 일이 있는데 심지어 징계까지 하는 일이 있다. 어떠한 종이 기도를 하기 싫어하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아무런 징계가 없다면 이 사람은 주님께서 택한 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택한 종이라는 것은 무엇을 내가 얻겠다고 구함으로써 주님이 준다는 것보다도, 주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기도할 목적을 알려주는 일까지 있다.

  우리의 참된 기도라는 것은 억지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이 무시로 되는 것인데 이것을 성령이 시키는 기도라고 보게 된다(롬8:27).

  택한 종의 기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요소가 있다.

  ① 기도를 항상 하게 되는 일이요.

  ② 중심에 불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일이요.

  ③ 구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일이므로 뜻밖에 더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느 종이나 택한 종은 자기가 기도하지 못하던 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기도할 때 자기가 메시아가 오면 수제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한 일도 전혀 없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하려고 기도했는데 이루어지는 일은 다른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택한 종의 기도 응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의 앞으로 될 일을 모르는 것이니 만큼 구하는 바가 언제나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더 큰 것이 이루어지는 일이 열매가 더 많아지는 택한 종의 역사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그 양심에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할 때 그는 두려워서 떨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한 번 설교할 때에 3천명이 회개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생각 밖의 일이 아닐 수 없다.

 

  3. 서로 사랑하게 된다. (17~20)

  택한 종이 된 자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도덕을 초월한 일인데, 아무리 어려운 일이 오거나 심지어 옥중에서도 불 속에서도, 환란 속에서도 서로 변치 않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 택한 종들의 사랑의 단체라는 것이다. 우리 사랑이라는 것은 주의 손에 붙들린 종으로서 사랑의 도구가 되다 보니 억지가 있을 수 없고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도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단체다. 금일에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 동역자의 잘못을 흠잡아 보려는 마음이라는 것은 성령이 떠난 사단의 회라고 볼 수 있다. 이 사랑이라는 것은 세상과는 원수가 되는 사랑이다. 왜냐하면 세상과 싸우는 단체이니 세상이 미워하는 것이다.

  금일에 종들이 세상과 타협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택함 받은 종으로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이 미워하는 것은 주님이 택한 증거라는 것을 본문에 말했다. 주께서 싸우던 싸움을 택한 종이 싸우는 것이니 우리는 끝까지 세상과 싸워서 이기는 것을 택한 종의 역사라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의 특색은 택한 종의 역사이다. 만일 택한 종이 없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세상보다 다른 점이 있을 수 없고 오히려 세속화된 교회로서 세상에 밟힌바 되어 아무런 열매 없는 나무가 될 것이로되 택함을 받은 종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은 세상에게 미움을 받고 멸시를 받고 압박을 받지만 초인간적인 역사가 나타나므로 오히려 세상 사람들까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종 앞에 다 굴복을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기도 응답이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지는 일이니 타협적인 노선에는 아무런 역사가 없게 될 것은 택함 받은 종이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령의 증거와 종의 증거

- 요 15:25~27 -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를 통하여 빠짐없이 말세에 될 일을 말 할 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시대가 이루어질 것을 목적 두고 선지들은 하나님께 묵시를 받아 성경을 기록하게 된 것이다. 선지들은 증거하는 사명이 아니고 앞으로 될 일을 기록한 자를 선지라 하는 것이다. 오시리라고 예언한 말은 다시 그 말씀을 증거할 때가 오므로 그 예언이 완전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지를 통하여 말세에 될 일을 기록하게 하시고 다시 증거하게 하는 사명자가 없다면 선지 예언은 아무런 효과를 이룰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성령의 증거와 사도의 증거를 말씀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성령의 증거 (25~26)

  아무리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말씀대로 죽으시고 말씀대로 부활했다 하여도 오늘에 성령이 증거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확실한 신앙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이 증거하는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진리를 깨닫도록 인도해 주신다(요16:13)

  인도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아니한 일을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고 이루어진 일을 깨닫게 하는 것을 인도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서 증거하게 하는 영이니 이 성령이 옴으로써 십자가의 도를 분명히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고전2:1~7). 아무리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았고 죽는 모양도 보았고 부활하는 것도 보았다 하여도 성령이 가르쳐줌으로만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눅24:45).

  인간이라는 것은 성령의 증거 없이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도저히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신 목적은 택한 자를 진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누구든지 성신의 인도가 있는 자는 성경을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성경을 읽을 적에 마음이 진리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진리 안에서 확실한 믿음의 지식을 얻도록 해 주시는 것을 성령의 증거라 하는 것이다.

  2) 이적, 기사(행4:29~33)

  이것은 어리석은 인간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의심할 때에 예수는 분명히 부활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성령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적 기사가 성신이 온 목적은 아니다. 성신이 자기가 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행하는 한 전도 방침이 된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참된 메시아라는 것을 만민이 알게 하기 위하여 무조건 이적과 표적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기사와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부어 주는 것은 택한 자에게 진리를 바로 믿고 바로 증거하기 위한 목적이니 불택자에게 성령을 주어 역사할 수는 없다. 만일 성신을 누구나 다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택한 자에게 성령을 보내서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하여 할 일을 하기 위한 목적이기 때문이다.

  3) 온전한 인격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다(엡3:16)

  사람이라는 것은 성령을 받음으로만 온전한 인격을 이룬다. 아담과 하와가 마귀에게 미혹을 받은 것은 성령을 받지 못했으므로 타락했던 것이다.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는 승리의 역사가 되는 성령을 받게 된다(계5:5~6).

  성령을 받으므로 인간이 그리스도의 대행자로 일할 수 있는 인격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성신 역사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게 될 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는 인격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자기 인격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피로 산 몸이니 주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주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2. 사도의 증거 (27)

  사도들이 4복음을 쓴 것은 성령의 계시를 받아쓴 것이 아니고 친히 목격자 된 자들이 목숨을 내놓고 열심히 전할 때에 성령은 거기서 믿고 깨닫도록 했던 것이다. 아무리 성령이 역사한다 해도 사도들이 들은 바와 본 바를 강하게 들어 증거할 때에 성령은 크게 역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종 된 자가 성령의 역사만 기다리고 가만히 있다는 것은 탈선된 행위라고 보게 된다. 4복음이 없다면 성령은 조금도 역사하지를 않을 것이다. 종 된 자가 할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성령을 받기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 할 일(행1:12~14)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기가 아무리 보고 안다 해도 성신의 역사가 없이는 도저히 그 증거가 아무런 열매가 없다는 것을 알고 성령이 임하기를 목적 두고 기도해야 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학적으로 배웠다 하여도 성령의 역사가 크게 임하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바가 없다면 그 종은 열매 없는 종이 될 것이다.

  사도들이 아무리 3년간 예수를 따라가며 배웠다 해도 그들이 합심기도가 있으므로 성령을 받고 그들이 합심하여 증거할 때에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 온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예수가 부활한 후에 친히 보았고 그 몸을 만져본 바가 있다 하여도 성령이 임하기 전에 아무런 일을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만 믿고서 종 된 자가 가만히 있다는 것도 탈선이요 자기가 배웠다고 성령의 역사를 의지하지 않고 증거한다는 것도 탈선이다. 언제나 성령은 사람이 할 일을 사람이 할 때에 역사하는 영이다.

  2) 강하고 담대해야 된다(행4:17~19)

  아무리 성신을 받았다 하여도 담대히 나가지 않으면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로되 담대히 증거할 때에 역사가 더 크게 일어난다(행4:29~35). 종이라는 사람은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할 때에 서슴지 않고 담대히 나갈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종이라 하면서 원수가 무서워서 말을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담대히 나갈 때에 하나님은 인정하시고 직접으로 그 종을 보호하고 역사 해 주시는 것이다.

  3) 조금도 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엡6:24)

  우리는 하나님이 맡긴 사명에 충성을 다할 때에 끝까지 변치 않는 자라야 은혜가 떠나지 않는 것이니 아무리 사명을 받았다 하여도 변함이 있을 적에 성령은 오히려 슬퍼하시며 근심하신다. 자기가 분명히 진리를 알았다면 죽어도 변치 않고 증거하는 자라야 순교적인 생활에서 왕권을 받게 될 것이다. 천하에 제일 위대한 인격은 끝까지 변치 않는 인격이라고 보게 된다. 아무리 영웅적인 투쟁을 하던 자라도 종말이 변해질 적에 오히려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자기가 친히 본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죽기까지 변치 않았던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역사는 성령의 증거와 종 된 자의 증거가 합치되므로 큰 영광을 나타내고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되므로 하나님은 여기에 따라서 조금도 빠짐없이 상급을 주므로 종된 자가 세세 왕권을 누리게 된다(계22:3~5).

 

진리의 성령의 역사  

- 요 15:25~27 -  

 

서 론  

성령은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역사하기 위하여 보내는 영이므로 진리의 영이라고 한 것이다. 진리의 영의 역사라는 것은 어떠한 역사라는 것을 주님은 분명히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영계 분별을 진리에 의해서 분별하는 것 외는 함부로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진리의 영의 역사에 대한 주님의 교훈을 찾아보기로 하자.  

1. 진리의 성령이 와야 할 이유 (16:7)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는 것은 예수님이 승천함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역사한 것은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줄 수 있는 일을 이루어 놓기 위한 것뿐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가 아니고 부활의 승리가 없다면 성령은 와서 역사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피를 믿고 부활의 생명을 받은 자에게 성령은 역사하기 때문이다. 세밀히 말하자면 성령은 천국의 건설을 위하여 인격을 이루어 주는 선물적인 역사를 하는 것이다. 성령은 십자가의 피를 믿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 역사를 하고 있다.  

2. 책망하는 역사 (16:8~9)  

성령은 조금이라도 불의를 용납할 수 없는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망은 사랑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소망이 있는 자식을 더 책망하는 부모의 사랑과 같은 사랑의 신의 역사이다.  

3. 진리로 인도하는 역사 (16:13)  

성령 자체가 진리의 영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진리로 인도하기 위하여 역사하는 것이니 진리의 보혜사이다.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숨은 비밀이 있는 것이니 성령의 인도로만이 진리의 비밀을 바로 알도록 끔 역사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자의적으로 절대적인 말이나 행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뜻에만 따라서 움직여 줄 것뿐이다.  

4.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15:26)  

만일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면 그리스도를 바로 신앙할 자는 없을 것이다.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바로 알도록 하고 또는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증거하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전력을 두지 않는다면 이것은 성신의 역사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5. 성령은 영원히 같이 해주시는 역사이다 (14:16)  

선물이라는 것은 영원히 소유가 된 것이니 성령이 오셔서 내주하는 것은 영원히 함께 해주는 선물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받은 영체는 영원히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거룩하고 신령하고 지혜롭고 능력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나뭇가지의 순이 진액을 받아 자랄 때 그 진액은 순의 자체를 완전케 하는 것으로써 그 진액을 소유하게 되는 것과 같다.  

결 론  

하나님은 영이 풍부하신 신이시니, 무한의 영을 사람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한 생명을 냈지만 꼭 같은 영이 천하 만민이 역사적으로 그 영을 타고난 거와 같다. 그러면 영혼이란 것은 그 마음이 사람의 본체 하나로 되어 있다면 성령은 완전한 사람을 만들되 영만이 아니라 그 몸까지 영체가 되도록 와서 역사해 주는 것이다.

다시 예를 들면 육체의 생활이 땅에서 식물을 먹고 자랄 때 이것이 식물로 말미암아서 완전한 몸을 이룸 같이 성령이 몸에 오시므로 영체를 완전히 이룬 것으로 되는 것이다(롬8:9).  

 

교회 안의 분쟁은 왜 있을 것이냐  

- 요 16:1~4 -  

 

서 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운 것은 참된 사도들 통하여 그리스도의 정신 사상 양심을 가진 종들로 한 가정적인 아름다운 교회로 세워진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있다는 정도로 아는데서 세워진 것이 아니고 시대적인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아는 사도들이 동족인 유대교인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 세웠던 것이다.

그 때에 소위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의 부활을 증거하는 자를 축출하고 박해, 사형을 처한 것은 그리스도를 이단으로 판정을 내린 교권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세상 끝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교회 안에 있으리라는 것을 미리 말씀한 것이 본문이다. 이제 어떻게 교회 안에 큰 분쟁이 일어날 것이냐 하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성경을 찾아보자.  

1. 시험에 빠진 자들이 권리를 쥠으로 (마24:10)  

이것은 주 재림시기에 사단의 흑암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인들의 마음을 강퍅케 만들고 서로 주권 쟁탈이 파당적으로 일어날 것을 말한 것이다. 이 때에 거짓 선지가 큰 기회를 타서 대 환난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가운데서 동석할 수 없는 사람이 됨으로 자동적으로 순의 종이 나오는 요시야의 집에서 모였던 몇 사람과 같은 숨은 제단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슥6:9~12).  

2. 종말의 예언을 무시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남으로 (사66:4~9)  

교회는 말씀을 바로 증거함이 완전한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심판기의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을 미워하고 쫓아내는 무리들이 교회 안에서 권리를 쥘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떠는 자로서 쫓겨남을 당할지언정 불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점으로 교회와 합할 수는 없을 것이다(사66:5~6).  

3. 교회의 상부가 부패하게 됨에 따라서 (습3:18~20)  

초대교회는 교회 상부가 신령하다 보니 약간의 이단자가 교회 중에 있더라도 이것을 책벌과 출교를 행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심판기의 교회는 대회를 인하여 근심하는 자들이 쫓겨남을 받고 수욕을 받게 됨으로 그들이 남은 자가 적다고 말씀하셨다. 대회라는 것은 상부의 최고 기관을 말한 것이니 최고 기관이 부패되는 동시에 하부에 이르기까지 큰 분쟁이 있을 것을 가르친 것이다.   

4. 미운 물건이 교회에 서게 됨으로 (단11:31~32)  

이것은 북방의 배도적인 정권이 정치적 도구로 쓰는 거짓 선지를 말하는 것이다. 계13:11이하와 대조가 된다. 이 미운 물건은 궤휼적인 정책의 앞잡이로서 거룩한 언약을 배반시키는 동시에 모든 사람을 타락시키고 있으므로 이 때 하나님을 바로 아는 자로 강하게 일어나서 용맹을 발할 것이다.  

5. 궤휼 친합이 있으므로 (단11:34)  

궤휼 친합이란 것은 북방 궤휼자의 수단 방법에 끌려 교회가 먹힘을 당하는 것을 말함이니 그 때에 그들 중에 지혜로운 자가 적게 남아서 연단을 받고 청결케 되어 마지막 때까지 이른다고 하였다. 우리는 진리 통합이란 것은 진리와 사랑 안에 통합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궤휼로 친합 된다는 것은 교회를 삼키는 사단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받는 자는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덮어놓고 사랑이란 간판 밑에서 분쟁이 없도록 해 보자는 것은 성서적은 아니고 분명히 심판기의 교회는 성도들이 박해를 받고 축출을 받고 연단을 받게 되는 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협상이나 또는 어떤 인물 중심이나 교파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미혹에 들어가는 넓은 길이 될 것이다. 싸워야 할 것이며 참아야 할 것이며 끝까지 말씀을 지켜야 할 의무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들의 영화와 아버지의 영화

- 요 17:1~7 -

  

  영화라는 것은 아들의 영화와 아버지의 영화가 무엇인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기독 신자가 덮어놓고 영화를 바라본다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영화와 성부의 영화를 바로 아는 데서 우리는 영화롭게 될 수 있다.

 

  1. 성자의 영화 (1~2)

  예수님께서 영화롭게 된 일은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첫째 :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 온 일이다.

  성자께서 영원히 성자의 신으로 있다는 것은 영화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아담을 낼 때에 아담 자신이 영화롭게 될 인격을 준 것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은 아들의 이름으로만이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둘째아담으로 나신 일이 창조의 목적을 달성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인 것이다.

  흙에서 난 몸이 흙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 영화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소원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로 거룩한 물과 피가 마리아에게 임하여 그 몸이 인간에 탄생되었다는 것은 성자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라는 것은 완전한 몸이 없이는 영화라는 것이다 풀의 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자의 신이 완전한 몸을 하나님께로 받았다는 것은 큰 영화를 가져올 싹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 : 그 몸이 대속의 제물이 된 일이다.

  아무리 성자가 완전한 몸을 성령의 잉태로 받았다 하여도 그 몸을 가지고 홀로 있다는 것은 영화가 될 수 없고 그 몸이 만민의 죄를 대신하여 죽음으로써만이 천하 만민이 예수님의 몸과 같은 몸으로 가지게 된다는 것이 큰 열매가 되는 것이니 영화가 되는 것이다.

  셋째 : 통치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통치하려 해도 죄진 사람을 그냥 두고 통치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그 아들에게 맡긴 것이 만민에게 영생을 주는 일이 됨으로 영화롭게 된 것이다.

 

  2. 성부의 영화 (3~7)

  조물주 하나님은 영화를 목적 두고 창조하신 것이다. 여호와의 신은 자기 홀로 있어서 아무런 영화가 없으므로 대 자연을 창조하시고 자연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도 그것을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을 통하여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이 된 사람은 자기 힘으로 도저히 자연을 바로 사용하는 인격을 갖지 못하므로 오히려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보다도 자연계의 지배를 받고 오히려 그 물질 앞에 종이 된 인생이라는 것은 조물주를 영화롭게 못하고 노엽게 하는 일이 된다.

  이제 성부의 영화는 무엇이냐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행하는 자가 있으므로(3~4)

  이 땅에서 하나님이 하라는 일을 하는 사람이 없게 될 때에 이 세상은 죄의 세상, 사망의 구렁텅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하라는 일을 다 하였던들 그야말로 얼마나 큰 영화가 될 것인가!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다고 말씀한 것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없다면 하나님께는 아무런 영화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그 영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보다는 하나님의 큰 슬픔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죽은 인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아버지 앞에 예배하고 하나님 을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은 큰 영화가 되는 일이다. 첫째아담이 순종치 않으므로 천하의 모 든 사람이 질적 타락으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엡 2:3).

  그러나 둘째아담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신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주고 싶은 사랑의 자체가 되신 하나님의 영화가 되는 것이다. 의중에 큰 의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을 순종하는 일이라고 보게 된다. 그리스도 한 분이 하라는 일을 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다.

  둘째 : 아들과 함께 영화롭게 됨(5)

  예를 든다면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있지 않으면 아버지 마음이 슬퍼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은 아들과 함께 영화롭게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아들이 영화롭게 될 때에 아버지는 그것을 자기 영화로 생각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는 것이다(요14:13~14).

  인간이 행함으로 되는 것보다도 아들의 이름으로 응답이 와서 이루어지는 일을 하나님은 영광스럽게 아는 것을 우리 인생은 알고 겸손히 그 뜻에 순종하는 것뿐이다.

 

  결 론

  영화라는 것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고 성부, 성자의 영화 아래서 우리는 같이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영화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성부, 성자의 활동은 죄를 지은 인생들이 성부, 성자의 영화 아래 들어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6 ~7).

 

때가 올 때 영화롭게 되는 일

- 요 17:1~2,  사 24:13~15,  사 60:5~9 -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정한 때를 두고 역사하시되 인간이 볼 때는 실패 같고 부끄러운 일, 수치스러운 일, 괴로운 일, 모든 난관을 당하게 하고 거기서 영화롭게 하는 일이 때가 올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는 일은 많은 대중이 따라오고 환영할 때가 아니고 인간 죄를 짊어진 몸으로 겟세마네 동산과 골고다를 거칠 때가 영화롭게 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자는 전혀 없었다.

  이제 때가 올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시기를 분별해서 알 수 있다.

 

  1. 그리스도가 영화롭게 되는 정한 때 (요17:1~2)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를 통하여 언약을 세운 말씀은 정한 때에 가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 때의 비밀을 아는 자는 심히 적었다고 보게 된다. 많은 유대인이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메시아가 와서 만민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을 그 때에 비밀을 아는 자는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갈 때에 호산나를 부르며 종려 가지를 들고 옷을 벗어 길에 깔고 대 환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가서는 한 사람도 내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나이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다 배척하되, 세 가지 사람이 나타났다.

  예수를 못 박아 죽이려던 원수들과 대중은 합세하여 자기네가 큰 승리를 본 듯이 떠들며 예수님을 비소하게 되었던 것이다. 죽기로 결심하고 따라가던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든 제자는 다 도망을 가고 말았던 것이다. 또는 십자가 앞에서 쳐다보고 울고 있는 마리아와 사도 요한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때가 예수님이 영화롭게 되는 시간 인줄 모르고 한편은 기뻐하고 한편은 낙망을 하고 몇 사람은 슬피 울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될 때를 내다 본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를 향하여 “ 너희들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하시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 영화롭게 되는 것은 주님만이 아실 일이요, 어리석은 인간들은 다 모를 일이다.

  인간이 볼 때에 나사렛 예수는 세상에 왔다가 비참한 죽음을 하는 그 광경을 볼 때에 그 누가 영화롭게 되는 일이라고 알 자가 있었을까. 의기가 양양한 대제사장과 모든 무리들은 자기네가 큰 승리를 본 듯이 떠들어댔다. 인간이 볼 때는 그들이 옳은 것 같고 예수님은 저주를 받은 것 같으나 하나님이 볼 때는 가장 영화롭고도 의로운 일인 동시에, 대 승리를 보는 때라고 보게 된다.

  우리의 영화라는 것은 대중이 알아주는 일보다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는 일일 것이니 오늘의 기독 신자들이 참된 영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중에서 하나님의 영화보다도 인간의 영화를 바라볼 때에 큰 부패를 가져온다.

  그리스도 한 분이 십자가에 죽음으로 율법의 시대는 끝이 나고 은혜시대가 들어오는 문이 열려지는 때였다. 하나님의 아들 한 분이 십자가에 죽으므로 세계 인류가 다 영생할 수 있는 영생의 길이 열렸다는 것이 얼마나 영화로운 일인가! 모든 대중은 참된 영화를 부끄럽게 알고 임시로 그 때 그 때에 자기를 영화롭게 하려는 생각은 멸망을 자취하는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이다(계18:7).

 

  2.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정한 때 (사24:13~15)

  모든 인간들은 지금 무신론 사상에 속고 있고 심지어 하나님이 죽었다는 신학설까지 나오는 이 때에 하나님의 진노는 반드시 올 것이다. 만일 이 때에 하나님이 잠잠하고 만다면 그야말로 무신론의 사상이 승리할 것이고 인본주의 사상이 복된 자라고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는 24:1이하에 하나님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고 뒤집어엎어서 일반이 되게 할 때에 땅은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세계 인류는 불타서 남은 자가 적게 될 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인 영원한 언약을 파하였음이라고 했다.

  세상에 인류 전멸이라는 무서운 환란, 재앙이 올 때에 동방 땅 끝에서부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했으니 어떻게 하여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된 다는 것이 이사야 24장~28장까지 기록되어 있다.

  인간 죄악을 짊어진 예수님이 영화롭게 될 때는 율법 시대가 끝이 나고 은혜시대가 올 때요, 은혜시대가 끝이 나고 무서운 환란, 재앙이 옴으로써 세계 인류가 전멸되고 남은 자로 새 시대를 이룰 때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때라고 했다 . 왜냐하면 십자가는 새 언약의 피로 구원을 완성한 것이요, 심판과 새 시대는 여호와 새 일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니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 (사43:19).

  이제 온 세계가 전멸되는 환란, 재앙이 올 때에 누가 하나님 을 영화롭게 하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서로 증명한다.

  첫째 : 끝까지 기다리고 있던 자이다 (사25:9)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시련을 준 것은 끝까지 기다리고 있는 자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며 성산의 축복을 받게 하는 것이다.

  둘째 : 해산의 수고를 다하던 자이다 (사26:16~19)

  언제나 해산의 수고를 다하던 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주님 다시 올 때도 해산의 수고를 다하던 자들이 1차 부활에 참여하는 동시에 여호와를 찬송하게 될 것이다.

 

  3. 동방 사람이 영화롭게 되는 정한 때 (사60:5~9)

  인생 중에 가장 영화롭게 되는 사람은 동방 사람이라는 것을 이사야 60장은 가르쳤다. 이것은 사59:19~21과 같이 되기 때문이니 동방 사람에게 신이 임하고 입에 말씀이 임함으로써 이것으로 영원한 왕국이 이루어질 오메가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동방에 임한 말씀의 빛이 세계를 밝힐 때에 열방 재물이 동방으로 들어오는 동시에 지상 축복의 새로운 땅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동방 사람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오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고 미움을 당하고 심지어 지나가는 자가 없었으나 그가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에 기쁨이 되게 하시는 것은 열방의 모든 통치권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사60:12~16, 사62:1~3). 이것이 하나님의 대 사업이 되는 것이다. 간교한 옛 뱀을 만들어 천하를 꾀어 보는 것은 미혹을 받지 않고 이긴 자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계 12:7~11).

 

  결 론

  영화롭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짐으로만 되는 것이니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계 인류의 죄를 사하는 진리가 말씀대로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시겠다는 말씀이 이루어지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될 것이고 새 일의 진리를 완전히 하나님께 받아서 세계에 전파하는 자가 될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이 있을 것을 때가 될 때에 영화롭게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창세 전의 영화와 말세 영화  

- 요 17:5 -  

 

서 론  

하나님의 영화라는 것은 스스로 있는 창세전의 영화도 있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서 이루어지는 영화도 있으니 이것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 창세전의 영화 (요17:5)  

성경에 창세기 1장의 태초라는 말과 요한복음 1장의 태초라는 말은 같은 태초가 아니다. 창세기 1장의 태초는 창세전의 영원한 태초가 아니다. 그러면 창세전의 영화라는 것은 어떠한 영화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는 스스로 있는 영화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을 통하여 받는 영화도 아니요, 피조물에게 주는 영화도 아닐 것이다. 신의 자체는 거룩이요, 사랑이요, 영생이요, 평화요, 미이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자체는 미의 하나님이니 그 미라는 자체가 피조물이 아니다. 신의 본체에 속한 것은 전부가 스스로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말세에 나타난 영화 (요12:28, 17:1)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기도 중에 한 말씀이 “나를 영화롭게 하사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했던 것이다. 그러면 창세전의 아들과 말세에 나타난 아들과는 인격적으로 다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에는 신성뿐인 아들이나 말세에 나타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가진 아들이니 사람 된 자격으로서 받는 영화를 말한 것이다. 그러면 사람 된 자격의 영화라는 것은 만왕의 왕이 될 수 있는 영화이다.

십자가의 죽으심은 만민을 살릴 수 있는 인격은 신성만이 아니고, 인성을 가진 인격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창조한 영화보다는 더 놀라운 영화는 십자가의 승리로 이루어진 영화일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전의 영화가 신에게 만족을 준 영화는 아니었고 인류를 창조하여 피조물 된 인간을 통하여서 완전한 천국을 이루어 당신의 영광을 혼자 누리는 것보다도 만민이 같이 누리게 되는 것을 원하는 사랑의 심정이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기 때 문이다.

이 영화는 무형적인 영화보다도 실체적인 영화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무형적인 신으로써만이 이루어지는 영화라면 육을 쓴 실체에 영화를 받아야 될 사람은 만족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러므로 예수님이 사람 된 자격으로서 영화를 얻을 것은 땅에 사는 인간들에게 큰 소망이 되는 동시에 세세의 왕국의 기업을 이루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을 가진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영화로운 것을 피조물 된 사람이나 만물까지도 같이 누려보자는 것이 광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화만이 인간의 최고 행복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 되게 하는 역사  

- 요 17:11~26 -  

 

서 론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세계 인류가 하나 되게 하여 사상, 정신, 중심 생활 정치를 다 통일시켜 세상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하나가 되게 하는 역사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본문을 읽음으로써 알 수 있다.  

1. 보전하여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11)  

이 땅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대적이 많으므로 특별히 주님께서 보전하여 주는 일이 아니라면 하나가 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선한 목자는 양을 하나같이 보전할 책임이 있는 것과 같다.  

2. 기쁨이 충만케 하므로 하나가 되게 한다 (13)  

우리 주님은 어떤 억압적인 정책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사람마다 기쁨이 충만하여 자동적인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3. 진리로 거룩하게 하므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17~19)  

하나님은 진리를 하나같이 알고 믿게 하는 동시에 진리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역사가 있다. 사람이 거룩하지 못하므로 하나가 못되고 거룩하여짐으로써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4. 영광을 주어서 하나가 되게 한다 (22)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믿는 자에게 주고 싶어 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자리에서 자동적인 하나가 되는 것이다.  

5.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한다. (23)  

하나님은 온전케 만들어서 알곡이 되게 하는 동시에 알곡 된 자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아직까지 기독교가 하나를 이루지 못한 것은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 까닭이 다. 온전이라는 것은 인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받는데서 온전을 이루는 것이다.  

결 론  

하나라는 것은 최대의 목적을 이루는 열매이다. 아무리 역사적으로 강대국이 있지만 그 정권이 하나를 이룬 것은 전혀 없다. 아직 세계적인 하나를 이루는 역사는 그리스도의 역사밖에 없는 것이다.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는 역사

- 요 17:21~24 -

 

  인류 역사상 하나가 되는 일은 심히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온전함을 이루게 됨으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신 것이다. 완전한 나라라는 것은 온전함을 이룬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온전함을 이루어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주 안에 있게 되므로 하나가 됨 (21)

  주 안이라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 안에서 아들에게 사명을 맡기어 세상에 보내시므로 아들이 그 뜻에 순종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일을 한 것과 같이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나’라는 자체는 다 각각 다르지만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므로 아드님을 보내셨고 그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므로 그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될 때에 우리는 아버지의 아들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 성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행하기 위하여 역사할 때 우리는 그 사랑에 이끌려서 하나가 되는 가운데 그리스도 품안에서 도덕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완전히 받아서 그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만이 하나가 될 수 있고 그 밖에서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타락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2. 영광을 받음으로 하나를 이룸 (22)

  세상 영광을 바라보는 자는 서로 물고 싸우다가 피차에 망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 자는 완전한 인격으로서 하나를 이루기를 성부, 성자가 하나를 이룬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은 만족한 영광을 소유하게 될 때에 더 이상 좋은 것을 바라지 않게 되므로 명예의 욕이나 물욕이나 그 밖의 모든 정욕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왜냐 하면 정욕이라는 것은 완전한 것을 받지 못한 타락한 인생이 만족이 없음으로 더 얻어 보려는 마음이 있을 적에 정욕이라는 것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받은 자는 세상 영광을 분토같이 보게 되므로 만족함을 얻은 인격으로 하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종이 세상의 어떤 영화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받지 못한 증거라고 본다. 그러므로 주께서 이 본문에 하신 말씀은 “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 인생은 주께서 주시는 영광을 받은 자가 아니고 는 완전히 하나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3. 성부 성자의 일체된 역사로 하나를 이룸 (23~24)

  하나님께서 인생을 일남 일녀로 창조했지만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몸에서 가인과 아벨이 나오게 되므로 하나를 이루지 못하고 형이 동생을 때려 죽였다는 것이 아담, 하와의 처음 열매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가정은 골육상쟁의 비참을 이루어서 피로 이 땅을 적시는 일이 시작된 것이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는 아브라함이라도 이스마엘과 이삭이 나오므로 원수가 되었고 이삭의 몸에서 에서와 야곱이 나오므로 원수가 되었고 야곱의 몸에서 열 두 아들이 있었지만 하나를 이루지 못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은 아담, 하와의 혈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님이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므로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를 이루는 역사로 말미암아 타락한 우리에게 완전함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 성자의 완전 역사로 말미암아서 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첫째아담이 하나님과 의합하지 않으므로 인간의 싸움이 왔고, 둘째아담 예수님이 하나님과 의합하므로 싸움이 없는 평화 통일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 론

  하나님의 소원이 온전한 사람으로 하나가 되어서 나라를 이루는 것이요, 사람이 원하는 것도 누구나 다 하나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는 역사를 순종치 않을 때는 오히려 하나가 되어 보겠다는 목적에서 피 흘리는 전쟁이 역사적으로 벌어진 것이다. 왜냐 하면 언제나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어서 강자의 세력으로 하나가 되겠다는 것이 죄악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생을 찾아 오셔서 인생을 위하여 자기가 죽어서 하나가 되게 한다는 것이므로 이 사상만이 완전한 사랑이니 이 사랑의 역사로만이 세계 평화 통일의 하나를 이루는 승리가 있게 될 것이다.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 되게 하는 역사

- 요 17:21~26 -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한 목적은 온전한 자로 하나가 되게 하는 나라를 이루어 영원히 당신의 영광을 누리게 하는 동시에 영광을 받고자 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선한 모략의 방법을 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체가 온전한 신이신 동시에 당신을 공경하고 복을 받을 사람도 온전함을 이루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 하는 열매가 된다.

  이제 온전함을 이루게 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보내신 예수를 믿게 하는 일로 하나가 되게 한다 (21)

  인생이라는 것은 자체가 온전한 것이 없는 피조물이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가장 간교한 뱀에게 진 것을 본다면 그 인격으로는 도저히 완전한 나라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므로 질적으로 타락하고 영과 육이 다 사망으로 떨어진 인간들을 하나가 되게 하는 데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를 믿음으로만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이다. 누구든지 보내신 예수를 믿는 양심에는 자기라는 것이 없고 보내신 예수를 받아들일 적에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의 행하신 역사는 전부가 믿는 자를 완전케 하는 열매가 된다.

 

  2. 영광을 주심으로 하나가 되게 한다 (22)

  인간이 자기의 영광을 목적 둔다는 것은 교만의 하나가 될 것이요, 주께서 주시는 영광을 바라보는 것은 겸손의 하나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세상영광을 분토같이 보고 주께서 주시는 영광만을 바라보는 자는 자동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영광을 인간에게 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그 영광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영광을 바라본다면 영광을 주고자 하시는 주님의 대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 영광 하나를 목적 두고 싸울 때에 세상 영광을 분토같이 보는 마음에서 승리의 용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오는 영광이니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자라야 그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보게 된다. 사람이 자기 영광을 내세우려는 것은 오히려 악한 자가 될 것이다(요12:4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3. 공평한 사랑을 통하여 (23)

  하나님께서 맏아들 되시는 예수를 사랑한 것 같이 아무런 사람이라도 믿는 사람은 공평하게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같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부모가 자녀들을 공평하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가 되게 하는 일이 못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에게 주신 성령을 우리에게도 주시고 그에게도 주었던 사명을 자녀가 되는 저희들을 통하여 행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누구든지 죄 사함을 받고 자녀가 될 때에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를 대한 것 같이 우리 인간들을 대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에서 나라는 자체는 없어지고 그 사랑으로만이 완전해 진다는 것을 믿고 나갈 때 자동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결 론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성부, 성자, 성신은 총동원하여 역사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케 하여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신이 하나된 것 같이 우리 인간들이 그 신과 하나가 되어 영원히 영광을 누리자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 역사라는 것이다.

 

주님의 간절한 소원  

- 요 17:24~26 -  

 

서 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따라서 믿어야 할 것이다. 주님을 알기도 하고 믿기도 하고 섬기기도 한다면서 간절한 소원을 모른다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남편을 섬기는 아내가 남편의 간절한 소원을 알아주지 못한다면 그 가정은 참된 평화의 행복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영적 신랑인 주님을 모시는 신부된 자로서 그 소원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참된 평화와 행복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간절히 소원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본 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1. 주님 계신 곳에 함께 있기를 원하심 (24)  

우리는 이 사랑의 심정을 믿는 신앙이 강해야만 될 것이다. 주님은 인간을 볼 때 당신이 계신 영광의 화려한 나라를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인간을 그 나라로 인도하기 위한 목적에서 불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는 심정에서 세상에 오셨고 또 십자가를 앞에 놓고 만찬석을 베푸신 후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올린 것이 내게 주신 자를 나 있는 곳에 함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었으므로 이미 성경이 응하기 위한 가룟유다 외에는 한 사람도 떨어지지 않고 그 나라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된 것이다. 우리가 구원을 조금 이라도 희미하게 안다는 것도 주님이 노할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말하기를 나의 나된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뿐이라는 것을 어디 가나 자랑했던 것이다.

이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참으신 것이니 소원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20세기 반기가 지나도록 참고 기도하는 심정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구는 구원을 받는다 못 받는다 판단한다는 것은 교만 중에도 교만이요, 주님보다도 더 높다는 교만이 될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이 소원을 위하여 죽으셨다면 우리도 형제를 이 곳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이 종의 심정일 것이다.

또는 주님께서 이 날까지 실수가 있어도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일흔 번 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도 이와 같은 심정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주의 종이 자기만 구원받을 자신이 있다고 하며 남은 구원 못 받는다고 판단하는 것은 사단의 자식의 행동일 것이다.  

2. 사랑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하신다 (25~26상반절)  

주님은 당신의 사랑이 그 마음에 있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있는 자의 기도라면 그 기도를 듣고 싶어 하는 심정이요, 구하는 것 외에 더 주고 싶은 심정이 주님께 있는 것이다. 기도란 주님과 인간과의 교통하는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임할 때 오르락내리락하는 영적 교통은 어느 곳이나 장소의 차별 없는 교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나 주님에게만 사랑이 있다는 것이 아니 요, 그 사랑이 각 사람의 마음에 임재하여 역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든다면 포도나무 그루터기에서 오는 진액이 순에 충만함 같이 예수님께 있는 사랑이 마음에 충만해 질 때 열매는 자동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3. 주님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하심 (26하반절)  

주님은 거룩하고 위대하신 주님으로서 죄인의 마음 가운데 함께 있기를 원하는 심정이다. 죄인의 마음에 와서 거해 달라고 하여도 올 수가 없는 것이 주님 자체다. 그러나 주님은 자청하여 마음 가운데 오기를 원하는 것이다(요일4:13).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는 것은 당신과 같은 형태를 이루기 위한 소원이니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 것은 어떤 우리의 노력이 합하여져서가 아니고 먼저 주님이 내 마음 안에 오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것은 행함으로 받는 것은 아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에 오시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완전치 못한 사람을 완전케 만들려는 심정에서 찾아오는 것이니 누구든지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이 오셔야만 내가 산다는 마음 하나뿐이라야 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은 이러한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만일 자기라는 것을 그대로 두고 주님을 오시라고 할 때는 들어 올 수가 없을 것이다. 주님 한 분밖에 없다는 마음에 오시는 것이니 영광도 생명도 축복도 주님 내 마음에 오심으로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족함이 없다 함으로 주님은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셨던 것이다.  

 

결 론  

우리의 완전이라는 것은 자체로써는 추호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주님이 소원하는 바를 믿음으로써 완전한 것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신자가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주님과는 원수가 될 것이다. 주님은 당신이 계신 나라를 주고 싶어서 죽기까지 애를 쓰시는데 그 나라 것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십자가의 원수가 될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오는 것보다도 어떤 사람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요구한다면 이것도 주님과는 원수가 된다. 주님이 마음 가운데 오시는 것을 원하는 것보다도 자기를 숭배하고 영화롭게 할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자동적으로 바벨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것은 주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세 가지 요소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순종의 걸음을 걸어가신 예수

- 요 18:1~11 -

 

  첫째아담이 순종치 않았으므로 모든 인류가 타락하였고, 둘째 아담 예수가 순종하시므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셔서 걸어가신 길에 대하여 깊이 알아야 할 것을 본문으로 증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숨기지 않고 자원하신 길 (1~5)

  예수님께서는 원수들이 당신을 죽이기 위하여 잡으려고 왔을 때에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시고 “내가 너희들이 찾는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어디에 숨어 있다가 원수들에게 잡혀갔다면 그 때부터 만민을 대속하는 제사가 될 수 없다. 왜냐 하면 억지로 진 십자가이니 죽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나사렛 예수이니 나를 잡아가라”고 하는 자원심을 가지고 나섰으므로 이 때부터 사상적으로나 중심적으로 마귀를 이기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일이 올 때에 담대히 나가지 못하고 변명을 한다든지 도망을 간다든지 한다면 그 시간부터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평안하다고 자원하고 괴롭다고 원치 않는 것은 순종하는 종의 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괴로운 일이라도 주의 뜻이라면 자원하는 마음 있어야 되고, 아무리 평안하더라도 주의 뜻이 아니라면 원치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나님 앞에 왕권을 받을 사상과 중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중심에 주를 위하여 괴로움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면 주님의 십자가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한다 하여도 응답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에 주님을 위하여 수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구하여야만 일 할 수 있는 능력이 오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원수를 피해서 숨어 있다가 잡혀 죽었다면 왕권 받을 만한 사상과 정신이 아니므로 이것은 순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계6:9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억지로 죽은 사람들이 아니고 불타는 마음으로 말씀을 증거하다가 죽은 자들을 가리켰다.

  괴로움이 우리 앞에 닥쳐올 때에 이것을 피하려고 하지 말고 이기고 나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더 큰 환란이 온다 해도 승리할 수 있는 강한 힘을 주님께서 주실 것이다. 주님께서 자원해서 고난을 받으셨으므로 주의 능력은 괴로움을 자원하는 자에게 오게 될 것은 사실이다.

 

  2. 괴로움을 홀로 받으려 하신 길 (6~9)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것은 자기 홀로 가야 할 길인 것을 아시고 절대로 함께 있는 제자들에게 괴로움을 주지 않으려고 하셨다. 만일 주님께서 괴로움을 함께 받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도망가는 제자들에게 불평을 두었다면 그 십자가는 인류를 대속할 만한 제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자기가 해야 될 일을 괴롭다고 해서 남에게 짐을 지우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기 때문이다.

  만민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걸머지신 만왕의 왕의 인격이라는 것은 여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제자가 죽어도 주님을 따라간다고 할 때에 오히려 이것을 원치 않으시고 이 사람들은 다 흩어져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부활 승천하여 성령을 부어줌으로만 일할 수 있는 제자들이니, 그 전에는 감히 골고다를 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의 종들이 자기가 받을 괴로움을 남에게 지우려고 한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이 잘 되면 자기가 맡아서 하려고 하고, 잘되지 않고 괴로움이 오면 그 책임을 남에게 지워 보려고 한다는 것은 왕권 받을 인격이 아니다. 교회의 지도자가 어려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어린 양떼들에게 자기가 할 사명을 같이 하자고 걸머지운다는 것은 그 교인들에게 많은 타격만 줄뿐이지 아무런 유익은 없을 것이다.

  어떤 목사가 교회의 양떼들이 자기와 같지 못하다고 불평을 두면서 억지로 일을 하라고 명령을 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할 일은 자기 홀로 걸머지고 양떼들에게 무거운 짐이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왕권 받을 목회자라고 볼 수 있다. 길러서 쓸 사람을 기르지도 않고 일부터 하라고 강단에서 명령을 한다는 것은 연한 순에 무거운 돌을 달아매는 것과 같다.

 

  3. 악을 악으로 대하지 않으신 길 (10~11)

  시몬 베드로가 검을 뽑아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베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떨어진 귀를 붙여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셨다(마26:52).

  우리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여기서 세 가지로 배워야 한다.

  첫째 :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시고 용서하시니 우리도 용서해 야 된다.

  둘째 : 하나님께서 억울함을 당하라고 하시니 불평 없이 순종해야 된다.

  셋째 : 왕권을 받는 것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아야 된다.

  왜냐 하면 왕권을 받기 전에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 날까지는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을 하지 않아야만 하나님의 참된 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악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데 종이 악을 악으로 갚는다는 것은 불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에게 억울함을 당한다 하여도 악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악을 이기는 길이라고 본다.

 

  결 론

  세상에도 순종하는 길이 많이 있지만 예수님같이 순종하는 길은 역사상 없었던 일이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신 그 길을 따라가려면 세상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하면서 예수를 따라 간다는 것은 아무런 열매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것과 같이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만 많은 열매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충성된 증인 예수

- 요 18:33~38 -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충성된 증인으로 죽기까지 증거하심으로써 만왕의 왕이 되셨다(계1:5). 만일 그리스도께서 충성된 증인의 한 사람으로 죽기까지 싸워 승리하신 일이 없다면 진리는 이 세상에 널리 전파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충성된 증인으로 승리하셨으므로 모든 종들은 그 증거를 대행하는 것뿐이다. 맏아들 되시는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으로 죽기까지 순종했으니, 다음에 따라가는 자녀들도 충성된 증인이 되어야 왕권의 반열에 들 수 있다. 이제 충성된 증인의 증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본문으로 말한다.

 

  1. 세상 나라를 초월한 것이다 (33~36)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절대로 내가 원수에게 피해를 당치 않는 다”고 하셨다. 이 말씀은 세상 나라는 마귀에 속한 것이니 예수님이 인간 죄를 짊어지고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 죽는 제사가 있음으로써만 하늘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볼 때는 원수에게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큰 실패 같지만 하나님 편에서 그 아들 하나를 죽게 함으로 세상의 마귀를 없앨 권세를 이룬 것이다.

  천국이라는 나라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가 없다면 그 나라를 도저히 이룰 수가 없다. 원수들은 자기네가 승리하는 것 같이 예수를 죽였지만 결국은 마귀를 없애는 일을 마귀가 한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의 자녀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므로 마귀가 없어질 승리의 왕권이 이루어진 것이다. 언제나 참된 증인은 세상 마귀와 싸우는 세상 나라에서의 승리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는 것이요. 충성된 증인으로 주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게 될 때에 세상 나라는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2. 참된 왕이시다 (37상반절)

  세상의 왕이라는 것은 참된 왕이 아니므로 그 왕권은 다 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참된 왕이라는 것은 영원한 왕이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는 왕이라는 것을 증거했던 것이다. 왕이라는 것은 끝까지 싸워서 승리한 왕이 아니고는 영원한 왕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왕권을 위하여 죽기까지 싸웠던 것이다. 세상의 어느 왕이나 자기의 정권 야욕을 가지고 싸우다가 정권 야욕을 가진 자에게 망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가 죄를 지었으므로 죄로 말미암아 자기가 남을 피해를 준 것 같이 자기도 피해를 당하는 것이 인간의 왕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의의 왕은 남을 살리기 위하여 죽기까지 충성을 다했으므로 살려 주는 왕으로써 왕국을 이루게 되니 원수가 없는 평화 왕국이 이루어진다. 남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왕은 그리스도밖에 없고 그 밖의 순교자들도 남을 살리기 위하여 죽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이라는 것은 남을 살리기 위하여 충성된 증인으로 죽기까지 싸우던 자들이 세계를 통치하는 왕국을 말한다.

 

  3.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러 오신다 (37하반절)

  진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것인데 충성된 증인은 예수님이나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으로 목적을 두고 싸우는 것이다. 이 날까지 증거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증거한 말씀을 세계만방에 전한 것뿐이다(사42:4). 예수님은 만민을 살리는 일을 하셨으므로 만왕의 왕이 되고 그 밖의 증인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진리로 인도해 주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므로 만왕의 왕국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가장 큰 일은 진리를 위하여 증거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도 세상에 와서 진리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으로 목적을 둔 것이니 사람이 세상에서 진리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 외에 더 큰 일이 없는 것이다. 참된 증인이라는 것은 참된 진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증거한 자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간교한 마귀를 낸 것은 참된 진리를 증거해서 마귀를 이긴 자로 왕국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다.

 

  결 론

  인생 중에 가장 귀한 사람이 참된 증인이요, 가장 귀한 일이 충성되게 증거한 것이요. 가장 귀한 영광이 충성된 증인이 누리는 세세 왕권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가장 높고도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도 충성된 증인으로 세상을 마친 것이다. 인생이 세상에 났다가 진리를 위하여 살지 못하고 빵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요, 진리를 위하여 끝까지 싸웠다는 것은 가장 존귀한 영광인 것이다.

 

진리를 증거하는 예수  

- 요 18:33~38 -  

 

서 론  

진리는 증거 없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숨은 어떤 비밀의 뜻이 있고도 이대로 이루어지기 위하여 노력이 없다면 이것은 쓸데없는 공상에 불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친히 그 진리를 증거하려고 피를 흘리는 생활이 없다면 진리가 이론적이나 또는 사람에게 호감을 줄 만한 소망을 말하였다 하여도 그 진리는 열매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진리를 바로 증거하는 일이 없이 이적을 행한다 해도 그 기적은 필요가 없고, 아무리 진리를 증거한다 해도 초인간적인 능력의 역사가 없다면 이 진리는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진리를 증거하는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담대히 말씀한 이 말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자 한다.  

1. 세상 나라를 목적하지 않았다 (36)  

만일 예수님이 세상 나라의 어떤 정치적인 야욕이나 또는 어떤 세상의 물질적인 발전을 중심한 일이 추호라도 있었다면 이것은 참된 메시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 나라의 것을 탐한다는 것은 더 좋은 나라를 이룰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 인격은 세상 나라에 속한 것이니 우리는 그러한 자를 신앙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 나라에 추호도 국한된 것이 없기 때문에 세상 나라 사람과 조금도 싸운 일이 없다. 만일 주님께서 세상 나라 사람들과 싸우다가 잡혀 죽었다면 그 십자가는 구속의 십자가일 수가 없다. 이것은 그 힘이 세상에 국한된 힘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종이 세상 정치적 배경을 둔다든지, 어떤 세상의 물질적 배경을 둔다든지, 이러한 자라면 진리를 증거하는 종은 아닐 것이다.  

2. 예수님은 자기가 왕이란 것을 말했다 (37상반절)  

이것은 세상 나라에 국한된 왕이란 것은 아니요, 초인간적인 즉 영원한 왕국을 위해서 왔다는 뜻이다. 주님은 세상 왕으로서 왔다가 죽었다면 이것은 실패 중의 실패였을 것이다. 그는 만민을 위하여 희생을 자취하는 자격으로서 온전한 왕국을 이루는 왕이다. 기독교의 진리라는 것은 전체의 대지가 예수가 왕이 된다는 이것이 원 대지가 될 것이다.

첫째아담이 실패함으로 죄악이 왕 노릇한 이 땅에 둘째아담 예수로 말미암아 의의 왕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진리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롬5:17). 세계 문제는 그리스도가 왕으로 다시 나타난 것만으로 일조에 해결될 것이다. 인생 난제는 이것으로만이 해결된다.  

3. 진리에 속한 자만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37하반절)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낼 때부터 그 심령이 진리에 속한 자로 택함을 입은 자도 있고 악에 속한 자로 택함 받은 자도 있으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진리에 속한 자를 위하여 오신 것이다(요10:27). 진리의 증거라는 것은 택한 자를 찾기 위하여 있는 것뿐이다.

예를 들면 목자가 음성을 내는 것은 자기 양을 들으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오셔서 증거하신 것은 마귀의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바리새교인 더러 “너희는 내 양이 아니니 듣지 않는다”고 했다. 만일 주님께서 마귀의 자식에게 맞도록 증거했다면 이것은 참된 증거가 아닐 것이다. 증거하는 목적은 택한 자를 찾자는 목적밖에는 아무런 딴 것이 없는 것이 예수의 증거인 것이다.  

결 론  

진리라는 것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도 있으니 무엇이든지 그 속의 내막을 진리라고 말하는 것도 있다. 심지어 공산당은 자기네 공산주의 이론을 거룩한 진리라고 말하는 사실도 있다. 어느 교파 각자가 다 자기 진리가 옳다고 말한다. 그러나 간단하고도 명랑한 주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이것이 없다면 아무리 이론화시켜도 주님이 목적한 진리는 아닐 것이다.

기독교라는 간판 밑에서 세상과 조금이라도 타협이 있다 해도 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이 된다는 것이 아니며, 택한 자만을 위해서라는 진리가 아니라면 이것은 거짓 선지요, 적그리스도의 영이 될 것이다.  

 

위에서 준 예수

-요 19:1~11-  

 

서 론  

우리는 무엇이든지 위에서 준 것이 아니고는 기거동작, 생활 전체를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이것으로서가 아니고 위에서 준 예수만이 인생 난제를 일조에 해결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위에서 준 예수의 비밀을 모른다면 본문에 나타난 빌라도와 같은 인물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 위에서 준 예수의 걸어간 길을 다음과 같이 생각하여 볼 것이다.  

1. 진리를 위하여 주신 예수 (요18:37)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전부가 진리가 되는 것이다. 이 진리라는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마귀가 왕 노릇하는 세상을 예수가 왕 노릇하는 세상으로 이루어지는 시대를 목적한 것이 진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위하여 주신 예수님은 어떠한 길을 걸어갔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생각할 문제이다.

그는 진리 하나를 바로 증거하기 위해서 지극히 낮은 말구유, 지극히 빈곤 한 목수의 생활, 지극히 낮은 죄인을 찾아가는 전도의 길, 지극히 참혹한 쓰라린 고통을 받는 겟세마네와 골고다의 길, 지극히 존귀한 몸을 가지게 된 부활의 길, 지극히 높은 영광을 가지고 승천한 길, 이것이 위에서 준 예수가 간 진리를 위한 길이었던 것이다.  

2. 순종하는 주님의 인내 (요19:16)  

우리는 주님이 당한 쓴 고난과 수치를 생각할 때에 머리는 찌르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몸에는 억울한 매를 맞고 입에는 쓴 초를 받고 손과 발에는 쇠못을 박고 귀로 들리는 소리는 저주, 악담, 비방, 조롱의 소리를 들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진리 하나를 위하여 이런 고난을 참았다는 것이 마귀를 이기는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고난을 당하신 예수를 구주로 받았다면 원망할 일은 하나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3. 사랑에 불타는 주님의 간구 (눅22:44, 23:34)  

우리는 기도가 자기 죄를 자복하는 간구도 있고 또는 남을 위하여 하는 간구도 있지만 주님의 간구와 같은 간구는 인간으로서 있을 수 없는 간구이다. 겟세마네 간구는 인간이 당할 심령고통을 짊어진 데서 호소하는 간구요, 십자가상에서 간구는 인간이 받을 죄악에 사망의 고통을 몸에 받는데서 구하는 간구이다. 이 간구라는 것은 세상만민의 죄 값의 영적 고통과 육적 저주에 사망고통을 짊어지고 대신 간구하는 것이다. 이 간구의 열매는 금일에 우리를 구원해 내는 역사가 되는 것이다.  

4. 승리의 호소 (19:30)  

우리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호소의 말씀으로 세상에 온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주신 어린 양 제물 된 몸으로서의 맡은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말 한마디는 율법적인 엄한 죄악의 대가를 지불하는 공의의 법칙을 이루는 동시에 인간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도 이루었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공의와 사랑을 다 이룬 십자가다, 십자가 하나로만이 인생의 무서운 죄악의 대가인 사망 문제와 영혼이 살 수 있는 영생의 문제도 다 해결된 것이다. 이제 부터는 십자가 하나에서부터 새로운 법 새로운 시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결 론  

위에서 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계를 통일할 권세가 있고, 영원한 천국을 이룰 공로가 되는 동시에 마귀를 없이 할 심판의 재료가 완비된 것이다.  

 

주님의 부활과 우리의 평강  

- 요 20:19~23 -

 

서 론  

주님께서 승리의 부활을 하신 아침에 인간에게 주는 것은 평강이었던 것이다. 만일 주님의 부활이 없다면 아담으로부터 오는 사망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참된 평강을 가져올 수가 없는 것이다. 평강이라는 것은 영원한 평강을 말한 것이다. 평강의 하나님은 평강을 잃은 인생에게 참된 평강을 주자는 목적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인류의 평강을 가져오는 새 아침을 맞이한 7일 중 첫날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을 숭배하던 성민의 안식이 아니요. 율법의 저주를 친히 받으시고 승리의 부활하신 주님이 평강을 가지고 오신 칠일 중 첫 날을 중생한 성도는 안식일로 받는 것이 복음적이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중생 받은 성도는 부활을 통해서 받았기 때문이다(벧전1:3).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평강이 오는데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경으로 알 수 있다.  

1.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한 것이다 (20:21)  

이것은 모든 권리를 맡기는 뜻이 있다. 이 날까지는 메시아가 율법적인 저주 아래 있는 인생의 죄를 걸머지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세상에 온 목적을 다 이루는 십자가와 부활로 끝을 맺고 이는 율법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새로이 중생 받은 제자들에게 명령을 인계하는 뜻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땅에서 역사할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고 너희에게 있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활동하고 얼마든지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일을 너희에게 준다는 것이다 . 율법의 저주 아래서 떨던 제자들은 이제 성신의 자유의 율법아래서 참된 평강을 얻어 가지고 나가서 역사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2. 성신을 받게 되는 것이다 (20:22)  

인생의 참된 평강은 성신을 받는 일이다. 평강의 신인 성신이 내게 올 때 아무리 악의 세력이 강하여도 성령의 역사는 필연코 승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요일4:13). 그리스도께서 승리의 부활이 없다면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줄 수 없고, 또는 부활을 믿는 신앙이 아니고는 성령을 받을 수도 없다(롬8:11).   

3. 정죄 사죄권 (20:23)  

이것은 그리스도의 대행자인 특명을 받은 종들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줄 진리를 받은 자들이다(마28:19). 주님의 직접 명령을 받은 종은 친히 성신이 같이 하는 종으로서 능히 판단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죄를 사함을 받았다면 사해지는 것이요, 사함 받지 못했다면 사함 받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죄를 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자로서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신의 역사로 되는 것이다(고전2:15).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은 신이라고 말했으니 직접 성경을 쓴 사도들은 신과 같이 쓰여지는 종이었던 것이다(요10:34~35). 세밀히 말하자면 강변에서 고기 잡던 어부의 한 사람이 이러한 권리를 주님께 받는 다는 것은 큰 평강을 누리는 축복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언제나 시대적인 말씀을 직접 받는 자는 이러한 권리를 맡기는 것이다(계11:3).   

결 론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마귀를 이기는 권리를 아들에게 주는 동시에 누구든지 그 복락을 믿는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을 받고 참된 평강을 누리게 하는 역사는 부활하신 그 날부터 시작된 것이다.

안식일이란 천지만물을 창조한 후 첫째아담에게 축복하신 날이라면 주님의 부활하신 날은 둘째아담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참된 평강의 왕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이루는 첫날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평강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 인류의 새로운 축복을 가져오는 날이 7일 중 첫날이다. 우리는 이 날을 예배의 날로 지키는 동시에 안식의 복락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복 있는 믿음

- 요 20:26~29 -

 

  인생이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 약점이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을 보고도 그 말씀을 그대로 믿지 않았다는 죄로 타락한 죄악 세상을 이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믿는 것보다도 그 말씀을 조금도 가감 없이 믿는 믿음이라야 하나님과 의합이 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나의 말을 그대로 믿어 주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 사람이 나를 대적하는 원수가 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 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대적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가장 복 있는 믿음은 무엇이냐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 (요20:26~29)

  도마는 예수님을 믿는 사도로서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고 부활 한 것을 본 사도의 말도 믿지 않고 의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과 옆구리를 만져 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었다.

  우리는 예수를 보고 믿는다는 것보다도 친히 예수님을 보고 그 교훈을 받아 증거하는 사도의 증거를 의심 없이 믿을 때 사도들에게 있던 역사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을 받는 것이 더 복된 일이다. 사도들은 이미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여러 가지 교훈을 받고 이적을 보고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는데 우리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우상을 공경하던 민족 중에서 난 사람으로 의심 없는 믿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복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들은 부활을 증거할 대표적인 종들이므로 확증적인 증거를 보여준 것인데 이것은 사도들만을 위하여 보여준 것이 아니고 우리들에게 믿게 하기 위하여 보여준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사도들이 증거한 말씀을 조금도 거짓이 없다고 믿게 되는 것은 그들을 거짓이 없는 참된 사도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순교하기까지 부활을 증거한 사실을 본다면 그들의 증거가 조금도 거짓이 없다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직접 사도들이 증거한 말대로 이루어지는 증거를 받게 될 때에 거짓이 없는 참된 사도라는 것을 확증하게 된다. 아무리 사도들이 증거했다 하여도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사도의 증거를 참이라고 믿을 수 없다. 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보았다 하더라도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역사가 없다면 우리는 축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았다 하는 것보다도 직접 내리는 역사를 받는 것이 더 복되다고 볼 수 있다.

 

  2.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믿음 (약1:3~4)

  가장 복된 생활이라는 것은 믿음으로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생활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시는 것은 부족함이 없이 살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아무리 믿는다 하여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지 못한 믿음이라는 것은 모든 일이 다 허사가 될 것이로되 인내를 온전히 이룬 믿음은 무슨 일을 당하든지 다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내를 온전히 이룬 믿음을 가진 자는 핍박을 받아도 큰 상급이 되는 것이니 모든 일은 다 영원한 축복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와 같이 인내를 이루는 믿음이라면 환란과 재앙의 날이라도 남은 자가 될 것이다(계13:10).

 

  결 론

  믿음이라는 것은 택한 자에게 주는 선물이므로  사람이 그 믿음을 좌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보고 들었다 하더라도 택함을 받지 않은 자는 믿지를 않는다(요10:26). 사람이 믿게 한다고 해서 믿고 사람이 믿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믿지 못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아무리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 하여도 그 진리가 마음에 완전히 믿어진다면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말씀을 믿는 믿음에서 말씀대로 오는 시험을 이기고 말씀대로 오는 축복을 말씀으로 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한 몸을 만져 보고서 믿는다는 믿음보다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내려오는 믿음을 받게 되는데서 조금도 거짓이 없는 사람을 통하여 그 믿음의 역사는 완전히 나타나게 된다.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 하면서 실천 생활이 없다면 그 사람은 믿음을 완전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그대로 믿을 때에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우리에게 역사 하시므로 말씀대로 오는 모든 축복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의 차이점  

- 요 20:30~31, 계22:6, 16 -   

 

서 론  

우리는 성경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의 원칙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을 쓴 목적의 차이점을 알지 못한다면 혼선을 가져올 염려가 있을 것이다 . 즉 성서는 한 시대를 목적한 것은 아니나 그 시대에 하나님이 역사하는 목적 하나를 가르친 것이다. 성경 자체가 영생인 것은 아니다. 성경을 통해서 시대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순종하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금일의 기독교의 혼선은 성경을 기록한 목적의 차이점이 분명치 못한 데서 혼선을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는 금일의 기독교 종말의 말기를 당한 이 때 성서의 목적을 바로 아는 데서부터 완전한 역사의 시발점인 것을 바로 알아야 할 것이다.  

1. 그리스도를 믿게 하자는 목적을 둔 성경 (20:30)  

복음서는 조금도 가해도 감해도 안 된다는 목적이 아니고 그리스도 한 분 을 바로 믿는 것을 목적한 것이다. 약간의 4복음서의 차이점이 있어도 여기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 시대의 복음 운동은 성경 해석이 서로 같지 않은 부분이 있어도 큰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만을 믿게 하려는 목적이니 종말관이 혼선이 되었어도 하나님은 묵인하였던 것이다.

이 날까지 강단 생활에서 종말관을 말하는 것이 각각 혼선이 있고 또는 성경 주석이 혼선이 있다 하여도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도록 하는 목적만 이루었다면 하나님은 성령으로 역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내가 이 글을 쓴 것은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진 것은 이와 같은 뜻이 있는 것이다.

베드로도 더 확실한 예언이 있으니 너희 마음에 새벽 별이 떠오르기까지 주의하는 것이 가하다고 했던 것이다(벧후1:19). 그러므로 사도들은 여호와의 책을 읽고 증거하되 부분적인 말씀을 이용한 것뿐이다. 그 목적은 예언서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게 하자는 목적에서 성경은 해석한 것뿐이다.  

2. 종으로 바로 역사하기 위한 목적 (계22:6)  

이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믿는 종으로서 시대적인 분별과 시대적으로 오는 환난과 재앙 속에서 진리를 바로 증거하도록 하자는 것을 목적한 것이 계시록이다. 만일 계시록이 아니었던들 그리스도를 믿는 종으로서 시대를 바로 증거하고 재앙 속에서 백성을 살리는 역사를 할 수 없을 것은 사실이다. 만일 어떤 종이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하면서 종말관을 똑똑히 증거 못한다면 주님 다시 오실 때 도저히 주 앞에 설 수가 없을 것이다.

주님께서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 있다고 했다. 은혜 시대에는 그리스도 한 분을 바로 믿기만 하면 되었으나 기독교 종말인 환난 재앙이 내릴 때 예언의 말씀을 가감하여도 재앙이니 이 말씀을 바로 증거 못한다면 대중을 죽 이는 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종은 계시록을 분명히 깨달아 꿀같이 먹고 다시 예언하는 종이 아니고는 권세 역사를 행할 수 없을 것이다(계 10:10, 계2:3).  

3. 교회로 환난에서 구원받게 하기 위한 목적 (계22:16)  

그리스도를 바로 믿게 하는 전도를 받아 선 교회로 그리스도가 다시 올 때 남은 교회가 되게 하는 목적을 둔 것이 계시록이다. 아무리 교회라 하여도 미혹을 받고 거짓 선지에게 표를 받으면 누구든지 영원히 멸망한다는 것이 계14:9~10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 종말의 구원은 육이 죽고 영혼이 구원받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은 절대적으로 아니다. 살아서 새 시대를 들어가는 것으로 목적한 것이 선지서인 동시에 계시록이다.

지금 교파의 활동으로써 교회가 섰으나 남은 교회가 되는 것은 교파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세밀히 말하자면 율법적인 교회에서 복음적인 교회로 설 때 그리스도를 바로 믿는 사도들의 역사로 토대를 닦은 것이다. 그러나 말세의 교회는 예언의 말씀을 바로 들어서 지키게 하는 목적을 둔 종들의 역사가 없다면 옳은 교회를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증인 감람나무 촛대라고 한 것이다.

이 날까지는 그리스도 한 분만을 믿게 하자는 목적에서 교회를 세웠으나 종말에 환난 중 재앙의 날에 미혹 받지 않고 새 시대로 들어갈 사람을 위하여 예언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기도 하는 것이 촛대교회의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도 교회통합이라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예언의 말씀으로 통합을 이루는 것 외에는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교회가 시대를 따르는 것보다 교회가 시대를 가르쳐 줄 책임이 있는 것이다.   

결 론  

우리는 교회 없이 믿을 수 없고 교회 없이 싸울 수 없고 교회 없이 보호를 받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회를 중심하여 역사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환난 중에 예비처의 양육을 받을 교회로서 계시록 12장에 해를 입은 여자라 했다.

은혜 시대는 개인적 구원을 목적했고 종말적인 심판에는 교회적인 구원이 온다. 교회적으로 망하는 교회도 있고 교회적으로 남는 교회도 있다. 그러므로 해를 입은 여자로 나타났다. 이와 같이 성경 전체를 논하면 메시아가 온다는 교훈도 있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를 믿게 하는 교훈도 있고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교훈도 있다.

 

주님의 역사와 인격의 차이점  

- 요 21:1~6, 행3:1~10 -  

 

서 론  

우리는 주님의 역사를 따르는 종으로서 그 생활의 차이점은 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역사를 따라서 하늘과 땅의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다.  

1. 주님의 역사가 없는 인격 (요21:1~6)  

베드로는 주님의 부활을 친히 보았고 만져 보았고 성경을 깨닫게 하는 은혜도 받았고 또는 세계적인 사명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큰 권능으로 역사하지 아니할 때의 인격이라는 것은 어떻다는 것을 본문에서 잘 알 수 있다. 베드로는 다시 할 일 없는 인격으로 자기 고향 어장으로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3년간 안해 보던 고기잡이도 해 보았다. 고기를 잡아 보니 3년간에 잘 잡던 고기를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도 못 잡는 인격이 되었다. 이러고 보니 과거에 예수님을 따라가기 전에 어부의 인격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실업자 중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인격이다. 나가서 식생활을 해결하자니 아득하기만 하고 속담에 시세 폭락이라는 말이 베드로에게 해당된 말이었다. 기술도 노력도 소용없고 좋은 그물도 소용없는 전부가 헛것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이때 주님은 그들을 찾아갔던 것이다. 주님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고 말했던 것이다. 순종하고 보니 150마리라는 많은 물고기를 얻었다. 얻고 보니 겨우 어부라는 인격을 찾게 되었다.

그 때 베드로는 심각히 깨닫는 겸손이 생겼다. 나는 이제 주님을 떠난다면 고기도 못 잡을 사람이라는 겸손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될 때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유구무언의 태도에 주님이 아신다는 한마디를 대답했다. “너는 내 양을 먹이라”는 음성을 들었으나 용기 잃은 맥 떨어진 사람이 되었다 . 이것이 주님이 역사하지 않는 종의 인격이라는 것이다.  

2. 주님이 역사하는 종의 인격 (행3:1~10)  

 1) 대중을 움직이는 인격  

인간이 상상 못할 일이다. 고기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는 인격이 한번 입을 열 때 3천명이 통회했다는 것은 과학적 지식으로는 이해 못할 일이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말씀은 금일에 와서 이루어지는 인격이다. 3년간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훌륭한 것을 보기도 했고, 훌륭한 교훈을 듣기도 했고, 훌륭한 주님의 부활체를 만져 보기도 했다. 그러나 보고 듣고 만져 보았다는 인격은 하등의 열매는 없었다 . 웬일인지 뜨거운 불덩어리가 몸에 와 부딪힐 때 그는 홀연히 3천명을 회개시키는 위대한 설교자인 인격을 소유했던 것이다.  

 2) 마른 다리에 힘을 주는 인격(행3:7~8)  

나면서부터 다리가 말라서 일평생 힘을 얻어 보지 못한 그 다리에 말 한 마디에 힘을 주는 인격이다.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준다는 말 한 마디에 예수님의 이름은 높아졌던 것이다. 이것이 세계를 지배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과학 만능을 부르짖는 금일의 세계를 지배할 인격은 여호와의 이름의 힘을 받는 자이다.   

 3)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인격(행5:1~11)  

인간이 볼 때 두려워 아니할 수 없는 인격이다. 말 한마디 책망이 있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일은 너무나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인격이다. 이 인격을 소유한 자는 원수를 회삼물같이 밟는 인격이니 이러한 인격이 최후의 승리를 이룬다는 것이다(사41:25). 하나님은 알파적인 초대교회를 수제자를 들어 쓴 것은 약간의 표적이 되고 오메가가 되는 동방 땅 끝의 종을 부르는 일은 전 세계의 열 왕을 굴복시키고 세계적인 원수를 짓밟고 나가는 역사이니 이 역사로써 기독교 종말의 끝을 맺는 것이다.

실수 많은 베드로가 어제는 주님을 저주하고 고기 한 마리 못 잡는 인격이 금일에 와서 이와 같은 표적을 보았다. 이것은 기독교 종말에 지렁이 같이 무가치한 인격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들어 쓴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성경도 똑똑히 모르고 아무런 영적 체험도 없는 베드로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썼거든 말세에 성경 지식을 소유하고 쓴 시련 겪은 권세 받은 종의 역사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사실을 상식적으로 판단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결 론  

기독교는 어떤 인간의 과학적인 인물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최저로 떨어진 지렁이 같은 인간이라도 주님만 사모하는 자라면 일조에 큰 변동을 일으키는 일이 하나님께로 오는 그 역사를 힘입어서 쓰여지는 인격으로 교회를 세웠고 교회의 끝을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신이시요, 무소불능하신 역사를 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종을 최저로 떨어뜨리기도 하고 최고로 당신과 같이 일할 수 있도록 올리기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이론이 아니요, 확실한 증거가 있는 사실이니 종말의 역사를 담대히 믿고 여호와를 앙망하여야 할 것이다(사40:30).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 차이점  

- 요 21:15~25 -

 

서 론  

하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특히 대표적인 자로서 인정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시인하는 바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두 사도의 사명의 차이점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두 사도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기독교 종말의 시대에 관한 문제가 결부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 사명의 차이점을 말하자면 다음과 같이 사명을 구별하여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1. 베드로의 맡은 사명 (15~19)  

주님께서 당신을 부인하던 베드로에게 세 번까지 반복하여 물어 본 것은 이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베드로의 심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베드로의 겸손을 요구하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모든 제자는 다 부인할지언정 자기만은 주를 위해 죽겠다고 장담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 사명을 가진 종이 가룟 유다 외에 더 큰 실수를 한 자는 베드로였다. 그러나 베드로가 끝까지 주님을 따라 갔기 때문에 이런 실수도 있었던 것이다.

베드로가 미리 도망했던들 이런 과오는 없었을 것이로되 끝까지 죽어도 같이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따라 갔던 것이다. 그러므로 실수가 있어도 제일 열심히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주님은 “네가 얼마만큼 나를 사랑하는 중심이 있어서 애썼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이니 너는 낙심 말고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것은 은혜 시대의 양떼에게 양식을 나누어줄 복음의 총 책임자로 너를 세운다는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들어서 높이 썼던 것이다.

이방 땅에 복음을 나가 전하는 일에 문을 연 자도 베드로요, 예루살렘 교회에 큰 부흥을 일으킨 자도 베드로요, 기독교 역사에 제일 큰 이적을 먼저 행한 자도 베드로요, 심지어 옥에 갇혔어도 천사가 그를 옥에서 해방해 준 일도 그의 사명이 컸기 때문에 천사까지도 동원했던 것이다. 주님은 사명을 맡긴 후에도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해 주겠다고 말할 적에 네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주님은 사명자에게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해주는 것이 주님의 책임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2. 요한 사도의 사명 (20~23)  

베드로는 요한 사도의 사명을 주님께 물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질문이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 두신다”고 하셨다. 이것은 요한의 사명을 말한 것이다. 요한의 사명은 주님이 다시 올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사명적으로 받은 계시록은 당신이 재림할 때에 이루어질 사명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들어서 크게 역사했다는 일은 있으나 요한을 들어서 크게 역사했다는 일은 없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본다면 베드로보다도 요한이 더 크게 쓰여져야 할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제일 사랑하는 제자요, 십자가 밑까지 실수 없이 따라가 십자가 앞에서 주님 대신에 아들이 된다는 맹세의 부탁을 받은 사도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을 들어서 큰 부흥이나 큰 이적 기사를 나타낸 일은 조금도 없는 것이다. 요한은 장로의 한 사람으로서 성모 마리아를 끝까지 받들어 효성을 다한 제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가 제일 깊은 주님의 교훈을 직접 받아서 쓴 일은 있으나 큰 놀라운 역사는 없었고 모든 제자가 다 순교를 당했지만은 그는 구십 노령으로 밧모섬에 가서 말세의 영원한 복음이 되는 안식에 들어갈 남은 종과 남은 백성이 읽고 듣고 지켜야 될 계시록을 받아서 기록하여 세상에 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록은 이 날까지 봉한 책으로서 전하지 않고 머물러 있었던 것뿐이다.   

이 계시록의 비밀은 주 강림시 재앙의 날에 전해야 될 사명자가 다시 꿀같이 하나님께 받아먹고 쓴 것이 있지마는 세계만방에 다시 예언한다는 것을 사도요한은 계시로써 받은 것뿐이다(계10:8~10). 사명적인 이름까지도 베드로는 사명적인 이름을 불렀으나 요한은 우뢰의 아들(보아너게)이란 이름을 받았지만 숨겨 두고 만 것은 그 뢰자(雷子)라는 이름은 심판이 내릴 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재림시에 전할 복음을 왜 요한에게 미리 계시를 주었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성경을 완전한 책으로 이루어 놓음으로써 그 책을 만방에 전할 것이기 때문에 신약전서를 완전히 구성하기 위한 것뿐이었다. 그러므로 종말의 증인은 다시 해석해서 증거함으로써 다시 예언자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금일에 와서 어떤 사람이 계시록을 맡아 가지고서 성경이 다시 나온다고 하면 이것은 혼선 중에 혼선이 될 것이며 기독교는 완전한 진리가 구비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예지와 예정이 계신 동시에 어떻게 종말에 가서 세상에 환난, 재앙, 심판을 나리며 어떻게 종을 들어서 쓰며 교회를 어떻게 보호해서 남은 종과 남은 교회로서의 새 시대를 이룬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친 것이 사도 요한이 받은 종말의 복음이다.  

결 론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를 놓아 터를 닦은 복음의 역사라면 요한의 사명은 기독교가 끝을 맺는 즉,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는 추수기에 사명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중생을 받고 성령을 받는 것이 베드로를 통해 받은 복음이라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서 재앙의 날에 재앙을 받지 않고 구원받는 복음은 기독교 종말에 끝을 맺는 역사가 될 것이다.

세밀히 말하면 은혜 시대 역사의 대표적인 사도는 베드로요, 환난 시대의 대표적인 사도는 요한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의 사명적 한계

- 요 21:15~21 -

 

  기독교는 사명의 한계선을 바로 지키는 것이 없다면 주님은 역사할 수가 없다고 보게 된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명자가 부족하다 하여도 필연코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해 주는 것이 사명을 맡기신 주님의 의무라고 보게 된다.

  이제 베드로의 사명과 요한 사도의 사명의 한계선을 분명히 주님은 가르쳐 주셨다.

 

  1. 베드로의 사명적 한계 (15~19)

  아무리 베드로가 주님의 부활을 철저히 믿지 못하고 주님을 따라가다가 실수한 일이 있다 하여도 주님은 친히 베드로를 찾아오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명을 맡긴 목적을 분명히 알려서 베드로를 들어 쓰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를 두 번째 찾아갔다.  

  첫 번에도 목수의 한 사람으로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를 부를 때에 나를 따라오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할 때에 베드로는 용기 있게 따라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사도의 직을 할 수 없는 인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에 다시 고기를 잡으러 갈릴리를 찾아갔지마는 밤이 맟도록 고기 한 마리도 못 잡은 어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에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두 번째 찾아갔다. 베드로를 보고 나를 따르라는 말을 하지 않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에 베드로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는 주께서 아시나이다 한 마디를 할 때에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거듭하시면서 베드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을 말했다. 이것이 사명자를 쓰는 주님의 뜻이라고 보게 된다.  

  부활을 증거하는 사명을 맡은 자가 아무리 부족해도 부활만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성신의 권능을 주어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해주시고 단 마음으로 순교까지 할 수 있는 힘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날까지의 모든 종들은 이 사명적인 한계 안에서 움직이는 종들이라고 보게 된다. 완전한 사람에게 성신을 주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부활을 증거할 신앙이 있다면 무조건 은사를 주어서 들어 쓰되 순교라는 끝을 맺도록 해주는 것이 은혜 시대에 사명자의 한계라고 본다.  

 

  2. 사도 요한의 사명적인 한계 (20~23)

  요한은 베드로보다도 실수가 없고 대신 아들이라는 명분을 맡겼지마는 요한에게는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이 없고 베드로가 사명을 물어볼 때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할 때에 모든 사람은 무슨 뜻인 줄을 모르고 죽지 않겠다는 말을 할 때에 육이 죽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고 그 사명을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 둔다고 하는 뜻을 말하면서 너희는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도 요한이 최고의 영계에 도달하는 사람으로 완전 계시를 받아서 그 글을 통하여 기독교 종말의 역사가 있으므로 재림의 주를 영접할 변화성도의 역사가 따로 있을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의 사명적 영감과 사도 요한의 사명적 영감이 시대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움직이는 종이 되어야만 될 것이다. 부활을 증거할 목적과 계시록을 증거하는 목적이 시대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어떤 종이 베드로의 사명적인 영감을 받아 그것으로서 끝을 맺는 역사인 줄 알고 계시록을 자기가 받은 영감에 한계를 탈선하여 억지로 해석한다는 것은 큰 과오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죄인을 부르는 주님의 심정과 재앙을 나리는 진노의 날에 하나님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종이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설 수 있는 사명이 무엇인 것을 모르고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생각은 너무나 얕은 영감에서 과오를 범하는 말이라고 보게 된다.  

  이제 사도 요한의 사명적인 한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알아야 할 것이다. 완전 영감이 있어야 된다. 왜냐하면 영감이라는 것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한계의 영감이 있고 성경 전체의 숨은 비밀을 전하는 영감도 있으니 베드로도 이 영감을 자기는 받지 못했으니 이 예언의 말씀은 새벽 별이 마음에 떠오르는 역사가 있을 때까지는 해석하지를 말라고 벧후1:19~21까지 말했던 것이다. 바울도 나는 십자가 외에는 더 말할 수 없는 영감이라고 말할 때에 그리스도 한 분을 아는 지식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빌3:8~9).

  우리는 사람이 자기가 진리를 연구한다는 것은 오히려 교만을 가져오는 폐단이 있게 될 것이다. 이날까지의 많은 종들이 여기에서 큰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계시를 받을 적에 자기가 작은 책을 꿀같이 먹고 배에는 쓴데 다시 예언하라는 계시를 보았던 것이다(계10:11).

  이것은 앞으로 세계적인 대환란이 올 시기가 이 땅 3분의 1이 피해를 당하고 계시록 9장과 같이 흑암이 세계를 덮고 인명 3분의 1이 죽어버리는 전쟁이 계9:15과 같이 일어날 때에 주님 오실 때이니 그때에 가서 완전 영감의 역사가 올 것을 그는 계시로 보고 쓴 것이 계시록 11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동의 위기를 앞에 논 금일에 와서 소위 세계 평화라는 간판 밑에서 영계 흑암이 교회를 침투하는 이때에, 사도 요한이 본 계시록 11장과 같은 영감을 받고 나서는 일이 없이는 기독교의 통일을 가져 올 수도 없고 남은 교회가 될 촛대교회를 이룰 수가 없고 승천하기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선지 사명을 할 수 없을 것이니 금일에 우리 사명자들은 사도 요한의 계시에 완전 영감을 받아야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교파를 초월하여 완전 계시의 영감으로 하나같이 예언의 말씀을 증거하는 푸른 나무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단체가 나와야만 될 것이다.

 

  결 론

  사명과 시대 또는 시대와 사명에 대하여서 우리는 바로 알고 이 시대에 선지적인 영감을 받는 일과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어진다는 복음 운동에 승리를 이루어야만 될 것이다.

 

주 재림시까지 머물게 한 사명

- 요 21:21~23 -

 

  금일에 기독교는 이 날까지 머물게 했던 사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시대를 따라 종을 들어 쓸 적에 성경이 없이 들어 쓴 종도 있고, 성경을 기록하기 위하여 들어 쓴 종도 있고, 기록한 성경을 바로 가르치기 위하여 들어 쓴 종도 있다. 먼저 성경이 없이 들어 쓴 종은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을 기록하기 위하여 들어 쓴 종은 첫째 모세니 이 사람은 몽학적인 율법을 받아 기록한 종이다.

  그 때에는 율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모든 종을 들어 쓰되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가르치는 시대가 있었다. 또는 언약의 말씀인 예언서를 기록한 종들이 있으니 이것을 선지 시대라는 것이다.

  이 종들로 기록한 글은 몽학적인 교훈이 아니요, 여호와께서 앞으로 말세에 행하실 일을 묵시로 나타나 말함으로 기록한 자들이다. 그 시대에는 선지서를 가르치는 때는 아니었다. 오히려 율법을 가르친다는 성전에서 참된 선지들이 묵시로 받은 책을 반대하고 심지어 불살라 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그 때 사람이 이 글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단시하고 배척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부터 재림시까지는 율법을 가르치는 시대가 아니고 선지서를 가르치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선지서를 가르치는 사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선지서를 가르치는 사도들을 박해하는 때가 있었다.

  이 때는 소위 율법주의라는 자들이 율법을 가르치면서 선지서를 가르치는 일을 반대했던 것이다(행3:24~26, 4:1~3). 아무리 율법주의자들이 반대해도 담대히 선지서를 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때가 사도 시대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성경을 해석해 주었던 것이다(눅24:25~27, 44~47). 이렇게 성경을 깨닫도록 가르친 것은 사도들이 성경을 해석할 범위를 말씀하되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한 성경을 가르친 것이다.

  선지서를 깨달은 사도들은 4복음을 기록할 때에 선지서를 가지고 해석하면서 예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이것이 은혜 시대의 종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지식의 한계가 되었던 것이다(벧후1:19~21). 어느 사도나 다 하나 같이 예언서를 들고 예수를 증거하는 것이 초대 교회 교훈이었던 것이다. 그 때는 신약 전서가 있은 것이 아니요, 성경을 가지고 증거할 때에 사도들은 율법을 가르치는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고 선지서를 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는 동시에 예수 행적을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행13:27~30).

  그 때를 지나 모든 사람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 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여 그대로 저술한 것이 복음서이다(눅1:1~3). 그 때는 성경을 새로 기록한다는 목적이 아니고 성경대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 행적을 썼던 것이다. 또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는 자는 성신이 오셔서 역사할 때에 선지서의 예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기록했던 것이다.

  편지서를 쓸 때에도 선지서를 증거하되 예언대로 은혜 시대가 왔으니 우리는 이루어진 십자가를 믿고 이루어진 성신의 역사를 받았으니 이리 저리 치우치지 말고 신앙생활을 바로 해 나가라는데 대하여 권면을 했던 것이다.

  그 후에 사도들이 기록한 책을 그대로 전하기 위하여 싸워 온 것이 기독교 역사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날까지에 머물러 있는 사명은 사도가 쓴 성경해석 외에 해석을 더할 자는 도저히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날까지에 정통학설은 사도들이 해석하여 놓은 해석에 의하여 좀 더 변론을 세밀히 말한 것이 정통 신학의 학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신이 충만치 못한 사람들이 학설을 쓰게 될 때에 금일에 영들을 죽이는 쑥물이 된 것이다.

  이 날까지 하나님께서 머물러 둔 사명은 이제 무엇이냐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전한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복음도 예수님이 전한 천국 복음이 있고(마24:14), 하나님께서 선지들에게 전한 복음이 있으니 이것은 천국을 목적한 복음이 아니요, 지상 왕국을 목적 한 복음이다(계11:15). 천국 복음은 베드로에게 맡긴 사명이요, 지상왕국이 오는 영원한 복음은 요한에게 계시로 보여준 복음이다. 바벨론이 망하고 성도의 나라가 온다는 것이다(계14:6~7, 20:1~3).

  기독교에 머물러 있던 사명은 붉은 짐승의 표를 받으면 죽고, 안 받으면 이 세상이 불타는 날에 남은 백성이 되어 새 시대 간다는 복음이다. 이 복음은 선지서에 기록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어 천당을 목적한 말씀이 아니요, 몸에 사망이 온 땅에 사망이 없는 시대를 이룬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사25:7~8). 인간에 사망이 온 것은 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니 죄를 없이 하고 사망을 없이 하는 세상을 이루어서 하나님의 종들로 큰 축복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에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의 재림이 임하는 날에 남은 종이 전하는 복음이다.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는 변화 성도가 전할 복음인 동시에 심판의 다림줄이 되는 것이다. 요한은 계시를 볼 때 인간 종말의 역사는 해 돋는 편에서 일어 날 것을 보았고 자기가 받은 진리는 재앙의 날에 읽고 듣고 지켜야 될 말씀이라고 받았던 것이다.

  이 재앙이라는 것은 인류 전멸의 재앙이다. 금일의 기독교가 머물렀던 사명이 무엇인지 알고 이 사명을 바로 찾아서 역사하는 일이 없다면 극도로 위기를 만난 것이 71년도부터 오는 시기라고 본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요한에게 이 계시를 보이기 전에 베드로가 묻는 말에 대하여 요한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머물러 두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선지서를 전하는 사명에 있어서 사도들은 선지서를 들고 십자가 부활을 증거했지만 재림시에 남아 있는 변화 성도는 선지서를 들고 심판과 새 시대를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때부터 선지서를 그대로 읽어서 전하는 때가 왔으니 이 말 저 말 쓸데없는 학설을 듣지 말고 선지서 전체를 그대로 전하는 자로만이 새로운 역사를 받음으로 완전한 승리의 용사로 새 시대를 정복하게 될 것이다.

 

  결 론

  선지서를 전하는 종들의 축복은 다음과 같다. 선지서를 들고 십자가 부활을 증거하던 종들은 은혜시대를 이루었고 선지서를 들고, 심판과 새 시대를 증거하는 종들은 새 시대를 이룰 것이다.

 

 

[ † 목 차 ]